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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가수다… 가무왕국 대한민국 - 2018.1.26.조선

하늘나라 -2- 2018. 1. 26. 22:36




다 가수다… 가무왕국 대한민국


"요즘 애들 노래나 춤 못하면 왕따당해요. 애들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엄마들도 몸치, 음치는 곤란하다니까요."
'흥의 민족'이라 불리는 한국인에게 춤과 노래는 전통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였지만, 이제 가무(歌舞) 실력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스펙'이 됐다.




"노래 못하면 왕따"… 동요·합창과외 받는 아이들
장기자랑 준비 위해 '댄스 동아리' 드는 신입사원
노래와 춤이 필수 스펙… '歌舞왕국' 대한민국


일반인 노래 자랑 TV프로 인기… 가수 뺨치는 라이브 영상 올리기도


가무에 능하면 인기 한몸에
지식정보는 인터넷으로 쉽게 습득할 수 있는 시대
가창력·춤 실력처럼 선천적 재능이 돋보여

나도 저 가수처럼…
직접 노래 불러 봐야 직성
일반인 따라 부르기 영상 음원차트 역주행곡 만들어

IT강국 디지털 문화도 한몫
블루투스 무선 마이크 포털 검색되는 제품 22만건
함께 사용하는 노래방앱 다운로드 100만건 넘기도



"요즘 애들 노래나 춤 못하면 왕따당해요. 애들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엄마들도 몸치, 음치는 곤란하다니까요."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박모(42)씨는 최근 초등학교 6학년 딸과 함께 집 근처 댄스학원에 '속성 몸치 탈출 3개월 코스'를 등록했다. 지난해 10월 2박3일 제주도 수학여행에 나섰던 딸이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게 발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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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의균

첫째 날 저녁 조별 장기자랑으로 가수 선미의 '가시나'를 추기로 했는데 박씨의 딸만 혼자 이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결국 친구들로부터 '장기자랑 불참'을 강요받았단다. 박씨는 "학부모도 학교 행사에서 종종 춤이나 노래 특기를 보여 달라고 할 때가 있어 같이 배우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런 고민을 가진 엄마는 박씨만이 아니다. 온라인 맘카페에는 "학교에서 가창시험 때 아이가 음치라는 게 알려져 심하게 놀림을 받아요"란 고민글이 자주 올라온다. 한 달에 10만~20만원 상당의 동요 과외, 합창 과외를 받는 초등학생도 많다.

지난달 한 보험회사 재무설계사로 갓 취직한 백모(24)씨는 최근 '스포츠댄스 동아리'에 들었다. 3개월 수습사원 기간이 끝난 뒤 있을 신입 환영회 장기자랑 준비다. 매주 2회 퇴근 후 꿀 같은 휴식을 반납하고 춤추러 간다. 스포츠댄스복과 구두 비용으로만 30여만원을 지출했다. 백씨는 "초보도 의상만 갖춰 입으면 그럴싸해 보일 것 같고 남들과 차별화될 것 같아 시작했는데 쉽지 않은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흥의 민족'이라 불리는 한국인에게 춤과 노래는 전통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였지만, 이제 가무(歌舞) 실력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스펙'이 됐다. 그 현장을 friday가 살펴봤다.



블루투스 마이크, 스마트폰 앱 켜면 '카 노래방'… 내 앨범 만들러 홍대앞으로 간다



학교서도, 직장서도 필수 된 '가무 스펙'


선글라스를 낀 남녀가 차 안에 울려 퍼지는 신나는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최근 블루투스 무선마이크를 활용해 다양한 장소에서 ‘노래방 놀이’를 즐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선글라스를 낀 남녀가 차 안에 울려 퍼지는 신나는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최근 블루투스 무선마이크를 활용해 다양한 장소에서 ‘노래방 놀이’를 즐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매년 송년회·신년회 시즌이 돌아올 때면 포털사이트 직장인 검색어 순위에 '회식에서 부르기 좋은 노래' '노래방 댄스' 등이 상위권을 차지한다. 연말연초 각종 행사와 회식 뒤풀이 노래방 타임도 매순간 가무 능력 시험대다. 직장인 김혜지(30)씨는 "팀장이 회식 때마다 순번 정해 노래시키는데 노래를 잘 못해 발라드 부를지 댄스곡 부를지 정하는 것부터가 스트레스다. 한번은 너무 가기 싫어 동기들끼리 짜고 '노래방에 자리가 없다'고 거짓말한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아이돌 스타를 보고 자란 어린 세대로 내려오면 가무 능력은 더 큰 스트레스다. 2016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국내 초등학교 4~6학년생 458명을 대상으로 한 장래 희망 조사를 보면 40.49%가 아이돌 스타가 포함된 '연예인'을 1순위로 꼽았다. 반면 지난해 1월 일본의 제일생명보험이 일본 유아와 초등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희망 직업을 설문한 결과 남학생은 7년 연속 축구선수를, 여학생은 20년째 음식점 주인을 1위로 꼽았다. 5위 이내에 연예계 관련 직업은 전혀 없었다.

그만큼 한국에선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면 또래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둔 학부모 김민희(42)씨는 "예전엔 운동 못하면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왕따였는데 요즘은 춤 못 춰도 무리에 못 낄 때가 많다"며 "엄마 닮아 몸치라고 할 때마다 미안해진다"고 했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인터넷 검색으로 누구든 지식 정보를 쉽게 습득하는 시대가 됐다. 그래서 누구나 공유할 수 있게 된 후천적인 지적 능력보다는 따라 하기 힘든 선천적인 재능이 주목받는데 가창력이나 춤 실력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했다.

너만 가수냐? 다 가수다!

'가무 스펙'에 대한 선망은 단순히 부러워하며 지켜보는 수동적 의미로만 그치지 않는다. 요즘 세대는 '나도 저 가수처럼 될 수 있다', 혹은 '보여줄 수 있다'는 자세로 적극적으로 소비한다. 최근 몇 년간 '너의 목소리가 보여' '판타스틱 듀오' 등 일반인이 노래 실력을 자랑하는 TV 프로그램이 시즌을 거듭하며 인기 끄는 모습이 이를 방증한다. 소셜미디어에서도 '일반인의 소름 끼치는 라이브' 등 가수 뺨치는 실력을 뽐내는 일반인 라이브 영상을 구경하는 페이지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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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쪽 사진) 엠넷 음악 프로 ‘너의 목소리가 들려’. / 엠넷 방송 화면 캡처 (아랫쪽 사진) 혼자 간편하게 노래 부를 수 있어 인기를 끌고 있는 코인 노래방. 직접 부른 노래를 녹음해 소장할 수도 있다. / 조선일보DB

남녀노소 불문하고 '나만의 데뷔 앨범'을 제작해 간직하는 것도 인기다. 지난 2016년 말 기준 서울시내 노래연습장 6447곳 중 192곳까지 급증한 코인노래방은 대부분 '녹음·녹화 기능'을 갖추고 있다. 춤추며 노래 부른 녹음본이나 녹화본을 이메일이나 USB로 옮겨 소장할 수 있다. 아예 헤드셋과 이퀄라이저 장비를 갖춰 녹음 환경을 세밀하게 조정할 수 있는 곳도 있고, 각종 소품과 카메라를 가져다 놓고 나만의 뮤직비디오를 찍을 수 있게 한 곳도 있다.

신촌·홍익대 등 전문 스튜디오가 밀집된 지역에서는 전문가가 실제 가수들과 작업하는 것처럼 전문 장비로 녹음해주기도 한다. 비용을 추가하면 원하는 사진을 커버로 한 음악 앨범과 저예산 뮤직비디오까지 제작해준다. 서울 마포구 홍대 정문 인근에 위치한 한 녹음 전문 스튜디오 관계자는 "3곡 기준 8만원가량 받는다. 주로 데모테이프 제작하는 가수 지망생들만 찾았는데 최근에는 오히려 일반인 신청자가 더 많다"고 말했다.

디지털 만나 더욱 강해진 가무 왕국


국내 음악산업 그래프
차체가 요동친다. 달리는 바퀴의 진동 때문만은 아니다. 가죽 시트를 때리는 비트에 맞춰 한껏 팔다리를 흔든다. 백미러에 비친 실물은 잠시 접어둔다. 대신 어젯밤 유튜브에서 본 아이돌 춤사위를 소환해본다. 지금 이순간만큼은 그들이 나고, 내가 곧 그들이다. 전주가 끝날 때쯤 오른손에 쥔 스마트폰 노래방 앱 화면에 노래 시작 박자를 세는 숫자가 떴다. 호흡을 가다듬고 함께 마음속으로 세어본다. '3, 2, 1, 지금이다!' 목청 가다듬고 왼손의 마이크를 잽싸게 입으로 가져간다. "빨간 맛! 궁금해 허니!"

요즘 '가무족' 필수 아이템으로 떠오른 블루투스 무선 마이크로 노래를 부르는 풍경이다. 블루투스로 스마트폰의 노래방 앱과 연결해 노래방에 가지 않고도 노래방에 온 것처럼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마이크로, 젊은 층은 물론이고 노년층 효도 선물로도 인기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검색되는 제품만 22만5000여 건. 가격은 2만~9만원 정도다. 주부 박민희씨는 "아이 데리고 노래방 가기도 마땅치 않고 집에선 층간 소음 때문에 신경 쓰여 드라이브하면서 가족들이 무선 마이크로 노래방에 온 것처럼 기분을 낸다"고 했다.

함께 연동해 사용하는 '노래방 앱'도 인기.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만 곡의 반주곡과 실제 노래방처럼 가사 띄운 화면을 제공한다. 일부 인기앱은 100만 건이 넘는 다운로드 수를 자랑한다. 유튜브에도 비슷한 화면을 제공하는 '가라오케', '노래방' 영상만 470여만 개가 올라와 있다. 노래를 즐기는 한국인의 특성에 IT 강국의 디지털 문화가 더해지면서 '가무 왕국'의 위력은 더 강해졌다. 실제 문화체육관광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 음악산업 매출 규모는 2005년부터 매년 증가해 2015년 현재 49조751억9600만원으로 10년 사이 3배 가까이 커졌다. 2005년은 유튜브가 등장한 해다.

역주행도 만들어내는 가무 사랑

최근 국내 음원 차트에 등장한 말이 '역주행'이다. 윤종신의 '좋니', 장덕철의 '그날처럼' 등 처음에는 차트 순위권 밖에 밀려나 있던 곡이 눈 깜짝할 새에 국내 여러 음원 차트 1위를 차례로 석권해 화제가 됐다. 해외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역주행 돌풍의 원동력을 한국인의 가무 사랑에서 찾는다. 역주행을 일으킨 대부분의 곡이 소셜미디어에서 일반인들의 '커버 영상(따라 부르는 영상)' 덕에 재주목받게 됐다.

유명 아이돌의 히트곡 공식에 곡을 대표하는 '트레이드춤'을 꼭 넣는 것도 일반인들의 커버 영상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한국만큼 적극적으로 춤과 노래를 따라 부르고 이를 공유하는 게 보편적인 나라는 드물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한국에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수동적인 문화 소비보다 능동적인 문화 소비가 더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했다. "단순히 보고 듣기만 하는 것보단 노래방에서 직접 불러보고, 한 번이라도 춤을 따라 춰 본 가수나 곡에 더 애착을 느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