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이야기

공영태(71) 공안과 원장 - 2018.7.21. 조선 外

하늘나라 -2- 2018. 7. 21. 21:42




정전협정문 작성한 '공병우 타자기' 아시나요

  •           


  •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우리나라 안과 1호 '공안과' 80년… 2代 공영태 원장이 말하는 故공병우 박사와 정전협정

    이미지 크게보기
    공영태 공안과 원장이 서울 용산 국립한글박물관에서 1953년 7월 27일 체결한 정전협정문(사본)을 들어 보이고 있다. 그 정전협정문을 작성한 ‘공병우 타자기’도 보인다. 그는 “비핵화는 답보 상태인데 북한이 악용할 수 있는 종전 선언부터 꺼내는 것은 속는 기분”이라며 “아버님이라면 반대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왼쪽 작은 사진은 부친인 고(故) 공병우 박사. ‘시간은 생명이다’가 가훈(家訓)이었다. / 오종찬 기자


    안과 의사이자 발명가였던 고(故) 공병우(1906~ 1995) 박사는 평생 세 번 죽었다. 조선 총독부의 창씨개명에 반대해 '공병우 사망' 전보를 본가에 날렸고, 6·25전쟁 중엔 인민군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다 탈출했으며, 생물학적으로는 1995년 사망했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문을 보고 그 이름이 떠올랐다. 한반도의 운명을 기록한 이 문서가 '공병우 타자기'로 작성됐기 때문이다. 공 박사는 1938년 서울 안국동 벽돌집 2층에 공안과를 열었다. 우리나라 안과 1호인 공안과는 올해 80주년을 맞았다. 쌍꺼풀 수술, 콘택트렌즈 도입도 국내에선 공안과가 최초였다. 현재는 3남 6녀 중 차남이자 유일한 안과 의사공영태(71) 원장이 운영하고 있다.

    공병우 타자기가 전시돼 있는 서울 용산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지난 5일 그를 만났다. 벗어진 이마와 눈매, 웃는 모습과 안경까지 부친을 빼닮았다. 공영태 원장은 "외모만 그렇지, 아버지의 좋은 점은 거의 못 닮았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1953년 6월 판문점에서 기자들이 휴전회담장을 취재하고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65년 된 정전(停戰) 상태는 종전(終戰) 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다. "올해 종전을 선언하는 게 우리 정부의 목표"라고 문재인 대통령은 밝혔다. 비핵화 협상은 답보 상태다. '종전'이라는 글자는 멀리 있다가 눈앞으로 갑자기 닥쳐와 초점이 맞지 않고 흐릿하다.

    공 원장은 "올해 급진전된 평화 무드가 믿기지 않는다.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냐"며 "북한에 또 속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안과 의사 공병우가 본 6·25

    공병우는 평안북도 벽동 산골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까지는 머리를 치렁치렁 땋고 서당에 다녔다. 스무 살에 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했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안과를 선택했다. 공병우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에는 "앞 못 보는 환자를 치료한다는 나 자신이 사실은 한글에 대해 '눈 뜬 장님'이었다"는 고백이 나온다.

    ―개업 직후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이 공안과를 찾았다지요.

    "눈병을 치료해드렸는데 불쑥 이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훌륭한 한글을 일본놈들이 못 쓰도록 탄압하고 있다. 조선 사람들도 제 나라 글에 관심이 없고 무시하기까지 한다.' 큰 충격을 받으셨나 봐요. 한글 시력 검사표부터 만드셨지요."

    ―한글 타자기와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광복 후 일본어로 된 안과 책자를 한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셨어요. 직접 번역하고 조수 둘이 정서(淨書)했는데 능률이 오르질 않았대요. 그 일을 계기로 한글 타자기 연구를 시작하셨습니다. 일단 뜻을 세우면 뿌리를 뽑아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셨지요. 저희는 어릴 적부터 경쾌한 타자기 소리에 묻혀 살았고요."

    ―공병우 박사 하면 '속도'라는 낱말이 떠오릅니다.

    "학교도 계속 월반하셔서 졸업장 한 장이 없어요. 타자기의 생명은 모양이 아니라 속도라 믿으셨고, 낮에 하는 결혼식은 시간 낭비라며 반대하셨고. 저는 그렇게 못 살았지만 아버님은 시간을 굉장히 아꼈습니다. 1분1초도 허투루 쓰지 않으셨어요."

    ―예를 들어주신다면.

    "한꺼번에 두세 가지를 하는 식이지요. 화장실 갈 때 신문과 라디오, 커피까지 가져가요. 하하하. 유난스러워 보이겠지만 아버지한테는 그게 편하고 정상이었어요."

    ―영어 타자기를 신체 해부하듯 뜯어놓고 구조부터 익히며 한글 타자기를 설계했다고 들었습니다.

    "가로쓰기를 하면서 (영어에는 없는) 받침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골칫거리였죠. 병원 일은 뒷전이었대요. 조롱은 물론 '공 박사가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었지요. 초성·중성·종성이라는 한글 구성 원리에 맞게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하셨어요."

    ―그 타자기 덕분에 목숨을 건지셨다고요?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을 믿고 피란가지 않고 서울에 남으셨답니다. 인민군이 들이닥쳐 아버님을 끌고갔어요. 1946년 '정판사(精版社) 사건'(조선공산당원들이 자금 조달과 경제 교란을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발행한 사건) 연루자 중 한 명이 '경찰에서 고문을 당해 눈이 멀었다'고 주장해 진단을 의뢰받았는데, 진찰해 보니 외상이 아니라 당뇨로 실명한 것이었지요. 그때 써준 진단서를 트집 잡은 겁니다. 졸지에 정치범이 돼 감옥에서 총살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셨어요. 강요받아 썼노라 둘러댈 순 있었지만 살자고 지조를 꺾을 순 없었답니다. 그런데 고문당해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하셨어요. 밑씻개 종이로 들어온 영어사전을 보고 무리하게 단어를 외우면 더 쇠약해져 빨리 죽을 수 있겠다 생각하셨대요(웃음)."

    ―그런데요?

    "무료로 눈병 치료를 많이 해줘 평판이 좋으셨어요. '인민 공화국에 타자기 설계도를 바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더랍니다. 국민학교 1학년 국어책을 타자기로 타닥타닥 옮기자 감탄하며 살려준 거예요. 인천상륙작전 직후 납북되다가 도망쳐 나오셨고요."

    ―부친께 타자기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군요.

    "구원자와 같았죠. '적선을 한 사람은 난리가 나도 산다'고 말씀하곤 하셨어요."

    정전협정에서 공을 세운 공병우 타자기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공병우 박사는 1940년대 초 한글시력검사표를 처음 만들었다. 그전까진 일본어로 돼 있었다. / 공안과

    정전협정은 유엔군(마크 클라크)과 조선인민군(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평더화이) 사이에 맺어졌다. 정본(正本)은 공병우 타자기로 만들어 마크 클라크와 김일성은 펜으로, 평더화이는 붓으로 서명했다. 공 원장은 "회담 내용을 한글, 중문, 영문으로 작성해 교환하는데 그때마다 공병우 타자기로 작성한 한글 문서가 가장 빨리 나왔다"며 "아버님이 무척 자랑스러워하셨다"고 했다.

    ―역사적인 순간에 어떻게 공병우 타자기가 들어갔나요.

    "6·25 직전에 미국에서 특허를 받고 시제품 3대를 만들었는데 아버님과 주미 대사였던 장면 박사, 언더우드 3세(원일한 박사)가 각각 사용했어요. 언더우드 박사는 6·25에 참전해 정전협상 땐 유엔군 통역장교였어요. 급히 아버님을 찾아와 한글 타자수 두 명을 구해 가셨지요."

    ―타자기가 공을 세웠군요.

    "영문 타자기보다 빨랐으니, 타자기의 생명은 속도라는 것을 증명한 셈입니다. 글자 모양이 빨랫줄에 빨래 늘어놓은 꼴이라는 타박도 쏙 들어갔어요. 우리가 매번 신속하게 처리하니까 북한 측이 독촉을 받으면서 쩔쩔맸대요."

    ―올 들어 남북 관계, 미·북 관계가 급변하는 걸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요?

    "이용당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북한이 당장 궁지에 몰려서 그렇지, 조금이라도 유리해지면 비핵화 약속을 지킬까요? 수백만 명 굶겨 죽이면서도 무기 만들고 전쟁 준비했는데 하루아침에 포기할까요? 트럼프 미국 대통령만 속이고 견디면 또 다른 세상이 온다는 속셈 아닐까, 좀 걱정이 됩니다."

    ―부친이 살아 계신다면 뭐라 하셨을까요.

    "아버님은 북한 법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니, 한·미 동맹을 흔드는 이름뿐인 종전협상엔 찬성할 분이 아녜요. 종전을 선언하면 미군 철수도 요구할 텐데, 그건 시기상조 아닙니까. 북한과 미국이 우리를 배제하고 벌이는 평화 논의, 저는 반대합니다."

    ―2001년과 2002년에 방북한 적이 있지요?

    "제가 속한 한민족복지재단에서 북한 병원과 빵공장을 지원했어요. 북한 영화나 자료를 보면 안경 쓴 사람이 드물었는데 왜 그럴까 하는 궁금증도 있었습니다. 지원은 2006년 북핵 실험 때문에 중단했고요."

    ―안경 쓴 북한 사람은 왜 드문가요.

    "노동자 월급보다 안경이 비싸더라고요. 안경점도 거의 없고요. 습관의 차이는 전혀 아닙니다. 시력은 영양상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북한 병원은 어떻던가요.

    "말도 못하게 열악하죠. 평양의대에 갔는데 녹슨 주삿바늘이 있고 거즈가 빨개요. 삶아서 재활용하는데 핏물이 빠지질 않아서예요. 소독된 병에 보관해야 하는 링거액을 맥주병에 넣어두고 종이로 막아뒀더라고요. 북한 의사들과는 잘 통했어요. 안과 수술법을 가르쳤는데 그 자리에서 100% 흡수하더라고요. 이게 통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눈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기관인가요?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들 하는데 그건 문학적 표현이고, 안과 의사들이 보기엔 '몸의 창'입니다. 당뇨·혈압 같은 질병이 눈에 먼저 나타나요. 혈관이 잘 보이거든요. 눈은 기능적으로도 중요하죠. 모든 정보의 80%는 눈으로 받아들인다고 하잖아요."

    "까꾸로(거꾸로) 살라우!"

    특허청은 1999년 공병우를 세종대왕, 장영실, 이순신, 정약용, 지석영, 우장춘과 함께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 7인에 선정했다. 그는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한 한글 기계화 운동가였고, '아래아 한글'은 그의 지원 아래 태어났다. 전국을 돌며 개안 수술을 무료로 해줬는가 하면 맹인 부흥원을 만들고 시각장애인들에게 타자기 사용법도 가르쳤다.

    ―세벌식은 우리가 많이 쓰는 두벌식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무엇보다 속도가 빨라요. 받침 찍을 때마다 시프트 키를 눌러야 하는 두벌식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3~4㎞마다 브레이크 밟았다 떼는 꼴이니까요. 왼손을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두벌식과 달리 양손의 부담도 고른 편이고요. 전두환 대통령 때 두벌식이 표준으로 채택돼 매우 낙심하셨어요."

    ―부친은 여러 겹의 삶을 사셨습니다.

    "대한제국 때 태어나 20세기를 살면서 21세기를 내다본 사람이라고 하지요."

    ―가족에겐 무척 짜다는 소리를 들으셨는데, 아들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나요?

    "뭔가에 몰두하면 가족도 없었어요. 당신은 구멍 난 양말을 신으면서 YMCA와 한글학회에 재산의 상당 부분을 기부하셨지요. 아무 상의 없이 결정해 어머님과 종종 투닥거리셨습니다. 나갔다 오시면 땅문서가 없어지곤 했으니까요(웃음). 저희야 섭섭한 정도지만 제3자에겐 아주 무심한 사람으로 비쳤겠지요."

    ―원장님은 왜 안과 의사가 되셨습니까.

    "아버님이 '이걸 해라, 저건 하지 마라' 하신 적은 없습니다. 세브란스 신경외과 레지던트로 뽑힌 상태였는데, 한 의사 선생님이 '그래도 집안일인데 해야 하지 않겠느냐'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는데 마음에 걸렸어요. 안과로 바꿨지요."

    ―부친이 반기시던가요.

    "'진짜 할래? 쉬운 길 아니다'라고만 하셨지요. 내심 기뻐하셨던 것 같아요. 1980년에 공안과를 인계받았지요. 저희는 선진국 기술과 장비를 배우고 도입하는 데는 진보적이지만 그것을 환자에게 시술하는 데는 보수적이에요."

    ―올해가 80주년인데 감회라면.

    "관성에 의해 '이 길밖에 없지 않나' 하면서 지나온 것 같습니다. 지금 의료계가 굉장히 열악해요. 제 자식을 포함해 아버님 손자·손녀 중에는 안과 의사가 없어요. 의사들 사이엔 '넌 아직도 아픈 사람 고쳐?'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있습니다. 의료 수가(酬價)가 너무 낮아 굶어 죽게 생겼으니 안 해도 되는 치료를 권하는 거예요."

    ―눈이 혹사당하는 시대인데 안과 환자에게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옛날보다 작은 글씨를 많이 보고 있기는 합니다. 눈이 침침하다며 불편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하지만 의료보험으로 병원 문턱이 낮아져서 그렇지, 환자 패턴이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안구건조증이 늘지 않았나요?

    "그 병명을 호소하는 사람만 많아진 거예요. 냉난방 기계가 보급돼 실내가 건조해진 탓입니다. 진짜 안구건조증은 10%고 나머지 90%는 의사들이 만들어낸 환자예요. 그렇게라도 페달을 구르지 않으면 병원이 넘어지니까요."

    ―공병우 박사가 별세하자 당시 PC통신 게시판이 조의문으로 뒤덮였습니다. 유언대로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고요.

    "사후 기증된 두 눈 가운데 한 눈은 제가 공안과에서 환자에게 이식했어요. 2년 전까지는 그분을 직접 진료했지요. 뵐 때마다 아버님을 다시 만난 것 같았어요. 그분은 112년 된 눈을 쓰고 계신 겁니 ."

    공병우 박사는 세 번 죽었지만 눈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 부친이 남긴 가장 큰 지혜는 무엇일까. 아들은 평안도 말투로 답했다. '까꾸로(거꾸로) 살라우!' "처음엔 우습게 생각했어요. 나이 들어 보니 말뜻을 알 것 같습니다. 다들 근심 없이 편안한 삶을 바라지만 그것이 제대로 사는 길은 아니라는 거예요." 쉬운 건 의심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IT야사] 공병우 박사와 한글기계화 운동

    게시일: 2013. 11. 21.

    공병우 박사는 우리나라 한글기계화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을 남긴 분으로 1949년에 세벌식 한글타자기 및 글판을 만들었다.
    1907년 1월 24일일 평안북도 벽동에서 팔삭동이로 태어나, 한국이 낳은 천재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공병우 박사는 1938년에 한국 최초의 안과 전문 의원인 공안과 의원을 개설했다. 국내 안과의 역사를 주도했다.
    의학박사인 공병우 선생은 처음에는 한글 기계화와는 거리가 먼 안과의사로 출발했으나 해방 이후부터 한글기계화운동에 주력하면서 1949년에 지금까지도 가장 효율적이라는 세벌식 한글타자기를 개발했다. 공병우박사는 한글 타자기를 '전국 과학 전람회'에 출품하고 1949년 10월에 국회의장상을 받았다. 1958년 10월에는 한글타자기 발명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으면서, 공병우 타자기는 한글기계화를 실질적으로 이끈 제품이된다.

    [채널IT(www.channelit.co.kr) IT N 38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