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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코도 모르면 잠자코나 있으시오! / 갈처사·숙종·서오릉 <펌>

하늘나라 -2- 2018. 8. 30. 15:27



■ 개코도 모르면 가만히나 있지 ■


숙종대왕이 어느 날 미행 중 수원성 고개 아래 쪽 냇가를 지나는 데 

허름한 시골총각이 관을 옆에 놓고 슬피 울면서 물이 나오는 냇가에다 

묘자리를 파고 있는 것을 보고 ‘아무리 가난하고 몰라도 유분수지

어찌 묘를 물이 나는 곳에 쓰려고 하는지 이상하다‘ 생각을 하고 

무슨 연고가 있지 싶어 그 더벅머리 총각에게로 다가가 

"여보게 총각 여기 관은 누구의 것이요?"하고 물었다. 

 

 "제 어머님의 시신입니다."

 "그런데 개울은 왜 파는 고?" 하고 짐짓 알면서도 딴청을 하고 물으니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합니다."


 미루어 짐작은 했지만 숙종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보게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여기다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하는가?"

하고 재차 다그쳐 물으니, 그 총각은 "저도 영문을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 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와 

절더러 불쌍타 하면서 저를 이리로 데리고 와 이 자리에 묘를 꼭 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지관인데, 저기 저 언덕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있습니다." 

라고 힘 없이 대답을 하고는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곤혹스런 처지를 처음 보는 양반나리에게 하소연하듯 늘어놓았다. 


숙종이 가만히 듣자하니 갈 처사라는 지관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궁리 끝에 지니고 다니던 지필묵을 꺼내어 몇 자 적었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수문장들이 성문을 가로 막거든 이 서찰을 보여주게." 

 

총각은 또 한 번 황당했다. 

아침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냇가에 묘를 쓰라고 했지, 

이번에는 웬 선비가 갑자기 나타나 수원부에 서찰을 전하라 하지. 

도무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총각은 급한 발걸음으로 수원부로 갔다. 

서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삼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수원부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허름한 시골 총각에게 유명한 지관이 동행하질 않나, 

창고의 쌀이 쏟아져 바리바리 실리지를 않나. 


"아! 상감마마, 그 분이 상감마마였다니!"  

총각은 하늘이 노래졌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냇가에서 자기 어머니 시신을 지키고 서 있을 임금을 생각하니, 

황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한편 숙종은 총각이 수원부로 떠난 뒤 괘씸한 갈 처사라는 자를 단단히 

혼을 내 주려고 총각이 가르쳐 준 대로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단단히 벼르고 올라가보니 산마루에 있는 찌그러져가는 갈 처사의 

단칸 초막은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이리 오너라" 

"..............."  

"이리 오너라" 

".............." 


한참 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게 뉘시오?" 

방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영락없는 꼬질꼬질한 촌노인네 행색이다. 

콧구멍만한 초라한 방이라 들어갈 자리도 없다. 

숙종은 그대로 문밖에서 묻는다. 

"나는 한양 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 처사 맞소?" 

"그렇소만 무슨 연유로 예까지 나를 찾소?" 

"오늘 아침 저 아래 상을 당한 총각더러 냇가에 묘를 쓰라했소?" 

"그렇소" 

"듣자니 당신이 자리를 좀 본다는데 물이 펑펑 솟아나는 냇가에 묘를 쓰라니 

당키나 한 일이요? 골탕을 먹이는 것도 유분수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숙종의 참았던 감정이 어느새 격해져 목소리가 커졌다. 


갈씨 또한 촌노 이지만 낯선 손님이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선비란 양반이 개 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 터인 줄 알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숙종은 기가 막혔다. 

(속으로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대왕 앞에서, 어디 잠시 두고 보자 하고 

감정을 억 누르며) "저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요?"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이 양반아 저기는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3백 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을 받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개코도 모르면 잠자코 나 있으시오!"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 처사 말대로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총각은 쌀 3백가마를 받았으며 

명당으로 옮겨 장사를 지낼 상황이 아닌가! 

숙종은 갈 처사의 대갈일성에 얼마나 놀랬던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공손해졌다. 

"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 등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 않고 

왜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이 양반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귀찮게 떠들기만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숙종은 이제 주눅이 들어있었다. 


"저 아래 것들은 남을 속이고 도둑질이나 해가지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 가져 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도 여기는 바로 임금이 찾아 올 자리여. 

지금은 비록 초라하지만 나랏님이 찾아올 명당이란 말일세." 


숙종은 그만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이런 신통한 사람을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었다. 

꿈속을 해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왕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 오시네. 잠시 기다려 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하며 방 귀퉁이에 있는 보자기를 풀어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면서 들여다보더니......  

그만 대경실색을 하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시간이었다. 

임금을 알아 본 것이다. 

"여보게.... 갈 처사, 괜찮소이다. 대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묻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소?" 


"대왕님의 덕이 높으신데 제가 신하로서 자리 잡아 드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어느 분의 하명이신데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갈 처사가 잡아준 숙종의 왕릉이 지금 서울의 서북쪽 서오능에 자리한 '명능'이다. 


그 후 숙종대왕은 갈 처사에게 3천 냥을 하사하였으나, 

노자로 30냥만 받아들고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이야기가 지금껏 전해오고 있다 

 

신묘 하도다 갈 처사여 냇가에 묘를 쓰고 산마루 언덕에 초막을 지으니 

음택 명당이 냇가에 있고 양택 명당은 산마루에도 있구나. 


임금을 호통 치면서도 죄가 되지 않으니 풍수의 조화는 국법도 넘어가네. 

볼품없는 초라한 몸이라도, 가난한 이웃에게 적선하고 

나랏님께 충성하노니, 그 이름 역사에 길이 길이 남으리라. 

 

 "왜 요즘은 갈 처사 같은 사람이 없나?"

 "아ㅡ글쎄올시다!"


- 옮겨온 글 -




葛處士(갈처사),개코도 모르면 잠자코나 있으시오!


肅宗大王의 墓자리 잡아준 朝鮮 제일의 風水 葛處士!


錦囊經이란 책은 흔히 葬書로 알려져 있는 風水古典 중의 하나이다. 금낭경은 風水 理論을 構成하는 가장 基本的이고 核心的인 內容이 手錄되어 있다.

금낭경의 著者로 알려진 곽박은 中國 진나라때 산시성에서 出生 하였으며 文學, 哲學分野에서 뛰어난 實力을 발휘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 그의 經歷이나 그에 얽힌 이야기는 세설신어(世說新語)와 진서(晋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唐나라 현종은 금낭경(錦 비단금, 囊 주머니 낭,經 글 경)을 무척 아껴 緋緞 주머니에 싸서 保管 하였다 하여 금낭경이라 불렀다고 傳 한다.

진나라 명제는 風水地理에 매우 밝았다. 그는 곽박이 葬事지낼 터를 봐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몰래 平服을 입고 가 보았다.

명제는 무덤의 主人에게 "왜 龍의 뿔에 該當되는 地勢에다 葬事지낼 터를 택했는가?
이곳에 葬事를 지내면 滅族하고 말텐데"라고 물었다.

그러자 주인은 "곽박이 이 地勢에 무덤을 쓰면 삼 년도 안 되어 天子를 모실 수 있다고 했소"라고 하자,

명제는 무슨 뜻이냐? 재차 묻기를 천자가 誕生한다는 말이냐? 라고 되묻자 , 주인이 말하기를 천자가 나다니요!

다만 天子의 質問을 받을 뿐 이라고 했소. 라고 대답 하였다. 이 말을 들은 天子는 果然 곽박은 風水에 通達하였구나! 하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傳해 내려오고 있다 肅宗大王의 墓 자리를 잡아준 朝鮮 第一의 風水 大家 葛處士 관한 이야기다.

朝鮮의 제19代 임금 肅宗大王은 民政視察을 자주 하였다.
어느날 肅宗大王이 水原城 고개 아랫쪽 냇가(지금 水原川 附近)를 지날 무렵 허름한 시골 總角이 棺 하나를 옆에 놔두고 슬피 울면서 땅을 파고 있는게 아닌가.

喪을 當해 墓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파는 족족 물이 스며 나오는 냇가에 墓자리를 파고 있는 더벅머리 總角의 悽涼한 모습에 "아무리 가난하고 땅이 없어도 有分數지 어찌 송장을 물속에 넣으려고 하는지 稀罕도 하다" 그래도 무슨 事緣이 있겠지 하며 다가갔다.

"여보게 總角, 여기 이棺은 누구 것인고?"    "제 어머님 屍身을 모실 棺입니다"

"여기는 왜 파고 있는고?" (짐짓 알면서 딴청으로 묻는다)  "墓를 쓰려고 합니다."

斟酌은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肅宗이다.

"여보게,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어머니 墓를 쓰려고 하는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處士라는 老人이 찾아와 저더러 불쌍타 하면서 이리로 데려와 이 자리에 墓를 꼭 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분은 有名한 地官인데, 저기 저 언덕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總角은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自身의 困惑스런 處地를 처음 보는 兩班나리에게 하소연하듯 아뢰었다.
肅宗이 가만히 듣자하니 갈處士라는 地官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窮理 끝에 지니고 다니던 紙筆墨을 꺼내어 몇 字 적었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書札을 水原府로 가져가게. 守門將이 城門을 가로 막거든 이 書札을 보여주게."

總角은 또 한 번 唐慌했다. 아침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지. 有名한 地官이 냇가에 墓를 쓰라고 했지. 이번에는 왠 선비가 갑자기 나타나 水原府에 書札을 傳하라 하지. 도무지 어느 長短에 발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地境이었다.    어쩔까 망설이다가 結局 急한 발걸음으로 水原府로 가게 되었다.

書札에 적힌 內容은 다음과 같았다.

"御命! 水原府使는 이 사람에게 當場 쌀 三百 가마를 下賜하고, 좋은 터를 定해서 墓를 쓸 수 있도록 急히 措置하라.

水原府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허름한 시골 總角에게 有名한 地官이 同行되지 않나,
倉庫의 쌀이 쏟아져 바리바리 실리지를 않나.

"아! 上監媽媽(상감마마), 그 분이 上監媽媽였다니!"

總角은 하늘이 노래졌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냇가에서 自己 어머니 屍身을 지키고 서 있을 임금을 생각하니, 惶悚하옵기가 말할 수 없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한편 肅宗은 總角이 水原府로 떠난 뒤 단단히 혼을 내 주려고 總角이 가르쳐 준 갈處士가 산다는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산마루에는 다 찌그러져가는 단칸 草幕이 있었다.

"이리 오너라" 한참 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게 뉘시오?"

房門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主人은 零落없는 꼬질꼬질한 촌 老人네 行色이다.
콧구멍만한 초라한 房이라 들어갈 자리도 없다.  肅宗은 그대로 門밖에서 묻는다.

"나는 漢陽 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處士 맞소?"  "그렇소만 무슨 緣由로 예까지 나를 찾소?"
"오늘 아침 저 아래 喪 當한 總角더러 냇가에 墓를 쓰라했소?"   "그렇소"

"듣자니 당신이 자리를 좀 본다는데 물이 펑펑 솟아나는 냇가에 墓를 쓰라니 當치나 한 일이요?
골탕을 먹이는 것도 有分數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

肅宗의 참았던 感情에 어느새 激해저 목소리가 커졌다. 갈씨 또한 村老이지만 낯선 손님이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마음이 便치 않았다.

"선비란 兩班이 개 코도 모르면서 參見이야.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名堂터인 줄 알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肅宗은 氣가 막혔다.
(속으로 이놈이 감히 어느 眼前이라고, 어디 暫時 두고 보자 하고 感情을 억 누르며)

"저기가 어떻게 明堂이란 말이요?"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이 兩班아! 저기는 屍體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三百 가마를 받고 明堂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屍體가 들어가기도 前에 發福을 받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개코도 모르면 잠자코나 있으시오"

肅宗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處士 말대로 屍體가 들어가기도 前에 總角은 쌀 三百 가마를 받았으며 名堂으로 옮겨 葬事를 지낼 狀況이 아닌가!
肅宗은 갈處士의 大喝一聲에 얼마나 놀랬던지 自身도 모르게 목소리가 恭遜해 진다.

"令監님이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등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 않고 이런 산마루 오두幕에서 산단 말이오?"
"이 兩班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을 것이지 귀찮게 떠들기만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肅宗은 이제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저 아래 것들은 남 속이고 도둑질이나 해 가지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 가져봐야 아무 所用이 없어. 그래도 여기는 바로 임금이 찾아올 자리여. 지금 비록 초라하지만 나랏님이 찾아올 名堂이란 말일세"

肅宗은 그만 精神을 잃을 뻔 했다.
이런 神通한 사람을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었다.
꿈속을 해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王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 오시네. 暫時 기다려 보오. 내가 再昨年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면서 방 귀퉁이 보자기를 풀어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면서 들여다보더니......
그만 大驚失色을 한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종이에 적힌 時間이 바로 지금 이 時間이었다.
임금을 알아본 것이다.

"여보게.... 갈處士, 괜찮소이다. 代身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묻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오"

"大王님의 德이 높으신데 제가 臣下로서 자리 잡아 드리는 것은 無限한 榮光이옵니다. 어느 분의 下命이신데 拒逆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갈處士가 잡아준 肅宗의 王陵이 지금 서울의 서북쪽의 西五陵에 자리한 "明陵"이다.
그 후 肅宗大王은 갈處士에게 三千兩을 下賜하였으나, 路資로 三十兩만 받아들고 忽然히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두 사람 똑같이 하루 아침에 天子를 만나고 임금을 만나 墓도 쓰기전에 쌀 삼백석 받고  좋은 明堂자리로 옮겨 墓를 썼으니 이 자리야 말로 천하의 明堂이 아닌가.


http://www.hanj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30






서오릉  西五陵                     


       


사적 제198호. 5릉은 경릉·창릉·익릉·명릉·홍릉을 일컫는다.


1457년(세조 3) 세자 장(璋:뒤에 덕종으로 추존됨)이 죽자 이곳에 안장(경릉)한 이래 1470년(성종 1) 덕종의 아우인 예종과 그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 1681년(숙종 7)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 1721년(경종 1) 숙종과 그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와 제2계비인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 1757년(영조 33)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이 들어서 능의 무리를 이루었다. 그밖에 이곳에는 명종의 큰아들인 순회세자의 순창원이 경내에 있으며, 1970년에 숙종의 후궁인 희빈장씨의 대빈묘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경릉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왕의 것이 오른쪽에, 왕비의 것이 왼쪽에 조성되지만 이것은 반대로 왕릉이 왼쪽에, 왕비릉이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형식이다. 추존왕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왕릉에 나타나고 있는 난간석이나 망주석, 석수 등의 호위가 없다. 반면 왕비릉은 생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도에 따라 구색을 갖추었으며, 난간석의 기둥은 창릉의 형식을 따랐으므로 특이하다.


창릉도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즉 상석을 받친 석족은 일반적으로 4개의 양각 귀면이지만 창릉은 문고리 모양을 조각했으므로 북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 또 난간석의 기둥머리는 연잎과 연주문이 보편적이지만, 창릉의 큰 석주는 둥근머리 밑에 환상받침을 마련하고 사각 석주로 변천되어가는 형식을 하고 있어 당시 일부 남아 있던 고려 왕릉의 석주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명릉은 조선 능제의 분수령이 되는 것으로서 그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석물의 치수를 실물에 가깝게 했으며 부장품의 수량도 감소했다. 둘째, 문인석의 미소와 무인석의 늘어진 투구와 이마에 새긴 투구의 파상선 등은 1649년에 조영된 장릉 석인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셋째, 8각의 장명등, 옥개를 4각형으로 제도화했다. 그리고 익릉은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 제도를 따르고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홍릉은 명릉보다 20일 늦게 조성했으므로 상설제도나 석물양식은 거의 비슷하다. 가령 문인석은 용모나 복식상태 등에 있어서 그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한 특징을 보여준다.




서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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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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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_대빈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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