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이야기

민경갑(84) 화백,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 2016.12.9.문화 外

하늘나라 -2- 2016. 12. 12. 21:27



“최순실 사태, 한국 전체가 모자라 생긴 일… 모두 반성해야”


▲  민경갑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지난 2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의 화실에서 “이런 난국에서는 여야 정치권이 우선 나라를 살리기 위해 합심해야 하는데 오로지 권력을 탐하는 듯해서 안타깝다”면서도 “여러 난관을 헤쳐온 우리 민족이니 이번에도 잘 극복할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문화] 파워인터뷰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민경갑 화백 


항상 새로움에 목말라 있는 만년 청년.’ 그에 대해 한 미술평론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를 만나본 후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올해 84세의 그는 창작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양에선 60세부터 다시 사니까, 자신의 나이는 풋풋한 24세라고 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인 민경갑 화백. 한국화(韓國畵) 대가인 그와는 내년 정유년(丁酉年)에 만나야 좋았을 것이다. 그가 닭띠 해에 태어났다는 것, 그의 호가 닭유(酉) 자를 쓰는 유산(酉山)이라는 것 등을 떠올리면 그렇다. 충남 계룡산(鷄龍山) 아래에서 태어난 그는 닭계(鷄) 자와 뜻이 같은 닭유(酉) 자로 호를 삼았다고 했다. 당초 그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한국화 대가의 그림 세계, 위작 논란과 경매 시장 문제, 예술원 회장으로서의 역할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시국이 소용돌이치면서 현대사의 굴곡을 다 겪은 원로에게서 지혜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병신년(丙申年) 끄트머리에서 그를 서둘러 만난 까닭이다. 지난 2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 잡은 유산화실(酉山畵室)을 찾았다. 아담한 2층 양옥의 아래층은 살림집이고, 위층이 화실이었다. 응접 소파가 있는 방의 벽면과 바닥을 그림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민 화백은 악수를 청하며 “인터뷰를 하는데 내가 작업복을 입고 있어서 괜찮을까”라고 물었다. 답을 원하기보다는 양해를 구하는 말투였다. 바로 옆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손님이 찾아오면 응대하기 때문에 주로 작업복을 입고 있다고 했다. 


―시국이 어지러워서 원로의 말씀을 듣고 싶은데, 예술가에게 그걸 여쭙는 게 가당한가 싶다.

어디선가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의견을 묻기에 이 정부의 문화융성 정책이 허구라고 답했다. 문화가 정말 융성하려면 거름을 줘야 하고, 지속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정권의 문화융성은 지속성도 없고, 뿌리도 없다. 게다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걸 보니, 문화융성을 하려던 게 아니라 도둑질을 하려던 것이었다. 초대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인 김동호 씨에게 내가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가 ‘말도 마라. 내 돈 쓰고 있다’고 하더라. 정부의 지원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이 한 번만 하고, 그만두지 않았나. 이제 와서 보니, 지네들(국정농단 세력) 돈 만들려고 다 짰던 거다.”

―이번 국정 농단 사건을 보며 여러 감회가 있었을 텐데. 

(민 화백은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다. 그는 1970년대에 당시 문교부 장관 이선근 박사의 추천으로 영남대 교수로 부임했다. 그때 영남대를 인수한 박 전 대통령이 그에게 대구에 동양화를 심어달라고 당부했고, 그는 그것을 소중한 기억으로 품고 있다.)

“박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니 최선을 다해 나라를 지키리라는 것, 또 미혼이니까 가족 관리의 부담 없이 청렴하게 국정을 이끌어 가리라는 것, 불행한 일들을 이미 겪었으니 어려움이 닥쳤을 때 잘 극복하리라는 것. 그런데 뜻밖에도 그러지 못했다. 안타까운 이야기다. 힘들어서 최순실에게 의지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하는데, 그보다는 역시 역량이 없었던 거다. 군부여서 정통성이 없다는 비판을 들었던 전두환 정권을 떠올려 보면, 그래도 요소요소에 사람을 잘 쓰긴 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그조차 없다.” 

―박 대통령이 물러난 뒤에 어떤 질서가 들어설지, 그 걱정을 하는 시점이다.

“이런 시기일수록 여야가 합심해서 난국을 돌파해야 한다. ‘우선 나라를 살리고 보자’고 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입법부가 권세에 취해 있다. 박 대통령이 물러난 후에 권력을 잡을 궁리에만 몰두해 있다. 여야가 똑같다. 탄식이 나온다. 왜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없는가. 이런 난국엔 국방 분야 등에서의 국가 기밀이 중요하다. 복덕방도 아니고 구세군 사업도 아니다. 그런데 나랏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왜 자꾸 공표하고 까발리는가. 예를 들어 사드 문제와 관련해 중국이 롯데 중국법인에 대해서 조사한다고 한 것은 우리 국회의원들이 그 방법을 알려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민이 대통령의 잘못을 징치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의혹이 사실과 뒤섞여 무차별 폭로된 것은 문제가 있다는 시각이 있는데. 

“대통령이 3차 담화 때 ‘거국 내각을 만들어 주면, 나는 그만두겠다’고 하면 됐을 텐데, 그 한마디를 안 해서 여기까지 이르렀다고 본다. 그런데 최소한 국가 원수로서 대통령이라는 위치는 우리가 생각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만들어 놓고 누워서 침을 뱉는 꼴이다. 위정자 한 사람이 아니라 당신과 나, 우리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 자기 자식을 폄하하면 밖에 나가서도 자식이 대접을 못 받는 법이다. 한국 전체가 모자랐다는 것을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 

민 화백의 생각은 그에 앞서 예술원 회장을 했던 유종호 문학평론가의 말과 통한다. 유 전 회장은 어느 인터뷰에서 “차선을 선택한 다수자의 기여를 통해 박근혜정부가 성립되었음을 고려한다면, 크게 보아 한국 정치의 실패”라며 “굴욕감에 광장을 채운 분노를 넘어서 이성의 민주주의가 작동할 때”라고 했다.

―산업화, 민주화를 다 이룬 국가라고 자부해왔다. 이번에 그 자부심이 깨졌다는 국민이 많다.

“그래도 끈질긴 민족 아닌가. 잘 헤쳐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젊은이가 꿈을 꿀 수 없는 사회라는 게 큰 문제다. 나는 평소 24세라고 하고 다니는데, 그 나이의 사유로 이야기해보면 꿈을 꿔봐야 소용없는 세상이 됐다. 정치인을 비롯한 기성세대가 젊은이를 위해 뭔가를 해 주려고 자꾸 노력해야 한다. 우리 사회 문제의 근원엔 교육이 있다.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인격과 실력을 좌우하는 바로미터가 돼서는 안 된다.”  

―예술원 이야기를 해 보자. 쟁쟁한 분들이 많은데, 거기서 회장으로 뽑힌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지.

(예술원 정원은 총 100명이고 현 회원은 88명이다. 민 화백은 작년 12월에 회원 선거를 통해 회장으로 선출됐다.) 

“내가 사람이 만만하게 보여서다. 심부름을 해달라는 거지. 회장 되고 나서야 하는 일이 그렇게 많은 줄을 알았다. 회원 평균 연령이 80세가 넘으니 올해만 해도 몇 분이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 가서 회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고, 각 분야 행사에도 참석해야 하니 바쁘다. 주변에서 자꾸 권유해 회장직에 나서게 됐는데, 지금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예술원이라는 이름은 거창한데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평생을 문화 발전에 바치고 뚜렷한 성취를 한 분들을 예우하기 위한 모임이다. 회원의 예술창작활동과 국제예술교류를 지원하자는 뜻도 있다. 1954년 법정 기관으로 창설됐으니 벌써 60년이 넘는다. 그런데 아직도 독립 건물 없이 셋방살이하는 데서 드러나듯 국가로부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예전에 프랑스 파리에서 전람회를 한 후 시골 마을에 간 적이 있는데, 안내자가 나를 한국예술원 회원이라고 소개하자 집주인이 술을 내오더라. 예술원 회원이 들러주다니 참 행복하다고. 프랑스는 어떤 행사가 있으면 대통령 바로 뒷줄에 예술인들이 앉는다. 우리는 어떤가. 젊은 국회의원들은 공항 귀빈실에 가는데, 예술원 회원은 못 들어간다. 나라가 예술원 회원을 대접하지 않는데 국민이 어찌 문화예술을 소중히 여기겠는가.” 

―예술원 정원을 보면, 영화 분야가 영향력에 비해 그 수가 적어 보인다.

(문학, 미술, 음악 분야의 정원이 각기 28명, 25명, 22명인데 비해 연극, 영화, 무용은 모두 합쳐서 25명이다. 영화 분야의 현 회원은 6명 뿐이다.) 

“예술원이 탄생할 때 순수예술 비중을 높게 잡았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 각 분야 회원 선출은 무척 까다롭다. 예술단체 등이 뛰어난 성과를 이룬 예술인을 추천하면 심사위원회를 구성한 후 위원 3분 2 출석에 3분의 2 찬성으로 승인하고, 총회에서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회원들은 대부분 연로한 탓에 건강이 좋지 못하고, 또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는 편이다. 그러나 예술가들인 만큼 물질적 대접보다는 정신적 예우를 바란다.” 

이 대목에서 민 화백의 작업실을 봤으면 한다고 청했더니 기껍게 응했다. 작업대와 함께 각종 화구가 있는 작업실 오른쪽 벽면을 채색화 하나가 꽉 채우고 있었다. 

“(벽면의 그림을 가리키며) 오늘 손 뗀 작품이다. 해방 직후 (내가 공부한) 서울대에선 채색화를 배척했다. 일본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한동안 수묵(水墨) 위주였다. 1960년대에 세계적으로 질감을 강조한, 추상표현주의가 나왔다. 그게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동양화에서는 내가 동참했다. 내가 추상화 1호인 셈이다. 8년간 추상 작업을 하다 보니까 ‘이게 내 말이 아니고 서양 말이다’라는 자각이 생겨서 그 말에서 내렸다. 새로 출발해서 오늘날까지 왔다. 내 것을 찾아 다시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연과 조화’, 그 후 ‘자연과 공존’, 그리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고 했으며, 그 후에 ‘무위(無爲)’ ‘진여(眞如)’, 지금은 ‘잔상(殘像)’단계로 넘어와 있다. 앞으로 어디로 갈지 모른다.”

그는 작업실 오른쪽 문을 열고 층계 벽에 붙어 있는 옛 그림을 보여줬다. “저기 걸린 게 1961년에 처음 한 추상작품이다.” 한국화 전위 그룹에 속해 비구상화를 과감히 선보이던 청년 시절의 패기가 느껴졌다.

―동양화를 하면서 추상을 택한 것은 실험 정신이었나. 

물론이다. 지금까지의 선배 작품들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세계적인 시류를 따라 추상화를 했지만,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바로 말에서 내린 거다.” 

―추상성에 구상성을 합치면서 자연을 택했다. 특히, 산을 그리게 된 계기는.

“산을 그리게 된 건, 시대의 여러 ‘주의(ism)’들과 사람들의 기호 등에 맞춰 나간 것인데, 그건 작가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서구에선 1905년에 피카소란 입체파가 나왔는데, 그때는 광화문엔 아직 마차가 다니던 시절이다. 6·25가 난 후, 서양 잡지가 들어오면서 나는 비로소 세상이 달라진 걸 알았다. 그건 마치 부산서 기차를 타고 밤에 급행으로 서울까지 온 거다. 중간역을 모르는 거다.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리긴 했는데, 여기가 서울인지 어딘지 모르는 건, 지금 현대인이 현대화를 모르는 것과 같다.”

작업실을 나와 응접 소파가 있는 방으로 다시 왔다. 여기저기 놓여 있는 그림들의 다채로운 색감과 두꺼운 질감이 사뭇 매혹적이다. 동양화에서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민 화백 특유의 기법이 녹아 있는 덕분이다.

미립자를 수없이 계속해서 깊이 있게 적립시킨 것이다. 언뜻 보면 쓱 칠한 것 같겠지만 수없이 많은 겹이 있다. 저 얇은 화선지 위에 색이 두껍게 보인다. 아주 깊이감이 느껴지게 색으로 덮은 거다. 몇십 년 그림을 그린 덕분에 깨달은 노하우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 전통미에 현대적 기법을 입혔다는 평가를 듣는다. 동양화, 그중에서도 한국화인데 서양화의 색·질감을 다 보듬고 있다. 흔히 서양화는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그림을 말하는 반면에 동양화는 화선지에 먹으로 그리는 그림을 일컫는다. 물론 동양화 중에도 천에다 채색한 그림도 있다. 한국화라는 이름이 나온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다. 중국, 일본과 다른 우리 그림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대학 교수로 재직한 바 있는 그에게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었다.

―서양화와 동양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동양화 중에서 한국화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회화라는 건 본래 동서가 없는 거다. 사람이 그냥 사람인 것처럼. 그런데 자세히 보면 백인, 흑인, 황인종이 있듯이 그림도 표현 방법과 정신세계의 전통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서양에선 르네상스 이후 인상파 등이 생기고 허무주의, 다다이즘까지 나왔다. 앤디 워홀의 팝아트, 마르셀 듀상의 소변기 작품 등은 처음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나중에 예술로 인정받았다. 그런 식으로 서양 미술이 발전해 지금은 자동차를 찌그러트리는 환경 미술, 광선을 이용한 홀로그래피 예술이 나왔다. 최근엔 인터랙티브(interactive) 아트라는 대화 형식의 그림도 생겼는데, 그것도 부족해서 음성을 인식해 색이 나오는 텔레 인터랙티브까지 왔다. 서양 미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과학과 함께한다.”

그의 설명은 얼음에 박 밀듯이 유창하게 이어졌다. 발음은 분명했으나 말이 빠른 편이어서 집중해서 들어야 했다. 

“동양은 기계나 과학보다 정신과 기(氣)를 중시한다. 작가의 혼(魂)이 실려야 작품이라고 한다. 동양화에 주로 쓰는 게 먹이다.(앞에 있는 종이에 한자 먹 묵(墨)자를 쓰며) 여기엔 명도(明度)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색상을 합치면 결국 무채색이 되고, 그 안에 이미 밝고 어두운 게 다 들어가 있는 거다. 이를 화선지 위에 표현하는 게 동양화다. 동양인들은 지구가 그 자체로 음이며, 태양이 있어서 그 빛을 받아 색이 나온다는 걸 진작에 깨달았다. 그게 동양 사람의 정신이고, 동양화의 정신세계다.”

―그림 재료와 정신세계 이외에 표현 기법의 차이도 있는 듯하다. 서양화와 달리 동양화는 일필휘지(一筆揮之)의 필력이 있어야 한다던데. 

“일필휘지는 기본이고, 심안(心眼)으로 표현해야 한다. 식물을 보더라도 이게 커서 꽃을 피울지 열매를 맺을지 심안, 즉 마음의 눈으로 본 것을 표현하는 게 동양화의 정신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먹으로 그리는 걸 피하고, 아크릴로 빨리 그린다. 또, 서양화가 비싸게 팔리니까 자꾸 서양화 쪽으로 기운다. 동양화는 필력이 생기기까지 오래 걸리고 어렵거든. 요즘 사람들은 뭐든 빨리 끝내려고 하는데, 동양화의 정신세계는 그런 게 아니다. 내가 늘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도 화선지와 먹을 고수하는 건 우리 전통의 원형을 지키기 위해서다. 우리 전통을 지니고 있으면서 여기서 더 나아가는 게 의무라고 느낀다. 온고지신은 고리타분한 게 아니다. 옛날 것을 받아서 이것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걸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림 시장 이야기를 해 보자. 현재의 경매시장을 어떻게 보나.

경매가 미술 시장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한 건 장점이다. 그러나 작품성이 높지 않아도 작가의 이름만으로 군중심리에 의해 높은 값에 팔리는 것은 결점이다. 화랑에서 개인이 작가와 소통하고 교감하며 작품을 사야 하는데, 큰손이 된 경매 업체가 소비자에게 ‘여기서 당신 맘에 들면 사시오’ 해버리니 미술 시장이 왜곡된다. 그 결과로 고가에 팔리는 가짜 작품이 계속 나오고 있지 않나. 어느 유명한 경매에 가서 보니까 한두 점하고 돌아가신 분인데, 그림이 많이 나와 있더라. 그분의 부인이 그림을 그리는 걸 봤다고 하는 이야기가 돌더라. 쉽게 속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수화(樹話) 김환기의 작품이 최근 53억 원에 팔리며 국내 경매 최고가를 경신했다. 수화의 그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수화는 서양화를 그렸으나 한국적 정체성을 탐구했고, 작품 세계의 지속적 변모를 추구했다. 그 점에서 20년 후학인 민 화백과 통한다.) 

“훌륭하신 분이다. 자기 틀 속에서 벗어나려고 늘 애썼다. 그것이 예술가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면, 10층 빌딩을 맨손으로 뽑아서 옮기는 것과 같다. 창작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거다. 이름을 대면 개성이 딱 나와야 한다. 어떤 걸 내놓아도 그 작가의 냄새가 풍겨 나와야 한다. 거기서 계속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작가는 자기 작품도 모방하면 안 된다. 자기 개성은 살려도, 자기 모방은 안 된다.”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취임 1년을 맞았는데, 그 성과에 대해 논란이 분분하다.

(스페인 출신의 전시기획 전문가인 마리 관장은 취임 때부터 논란이 있었다. 외국인이 국립미술관을 맡아도 되는지, 그가 적절한 경력을 갖췄는지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미술계에서 제기됐다.)

“양식 만들던 사람이 한식을 한다는 게 문제다. 한국 미술사를 알고, 작가들도 알아야 하는데…. 관장과 직원들 사이에 언어 장벽으로 소통이 되지 않는다더라. 여러 가지로 안 될 조건 아닌가. 여기서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우리에게 근대 미술관이 필요하다는 거다. 실험적 현대 미술을 소개하는 전시는 많은데 우리 미술이 어디에서 어디로 왔는지 알려 주는 것은 드물다.”

―미술대학에서 강의하실 때 어떤 걸 강조하셨나. 자녀를 미대에 보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미대 수업에선 주로 동양정신을 강조했다. 과연 우리 것이 무엇이냐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미대에 자식을 보내려면 그냥 놔두는 게 최상의 길이다. 부모가 바라는 대로 키우려고 하면 자식이 부모의 아류가 된다. 그러면 작가가 될 수 없다. 자기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 한다. 초등학교 때 미술학원을 보내면 다 버린다. 적어도 중학교 이후, 고등학교 들어가서 해야 한다. 어릴 때 잘 그리는 애들은 환경 덕이지, 자기가 정말 잘해서 그리는 게 아니다. 어릴 때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서 ‘화가 해라라고 하면 큰일 난다. 틀 속에 넣으면 더 못 큰다.” 

―근년에 아프셨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건강하고 활력이 넘쳐 보인다. 비결은 뭔가.

암도 겪었고, 척추와 요도비대증 수술도 했다. 활력 있어 보인다면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황혼에 지켜야 할 12도(道)란 게 있지 않나. 그중에 3도를 지키려고 한다. 후배를 선배같이 대하는 예도(禮道), 나이가 들수록 모르는 게 많으니 계속 배우는 학도(學道), 베풀어서 덕을 쌓는 품도(稟道). 후배들에게 요즘 자주 하는 말은 ‘’에 관한 것이다. 세상에 여러 가지 금 중에서 ‘지금’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안 온다. 그러니 시간을 아껴서 즐겁게 쓰고, 늘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나는 후배들에게 말하곤 한다. 낙망하지 마라, 사방이 막혀도 한군데 하늘은 뚫려 있지 않느냐.”  


인터뷰 = 장재선 문화부장 jeijei@munhwa.com 
정리 =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제57회 3·1문화상 11 축사 민경갑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게시일: 2016. 4. 7.

민경갑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제57회 3·1문화상 수상자
학술상 인문사회과학부문 : 김화경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학술상 자연과학부문 : 서진근 연세대학교 교수
예술상 : 박만규 극작가/연출가

2016년 3월 1일 오전 1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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