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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47 사무엘) 신부, 바티칸 변호사 - 2017.9.2.조선外

하늘나라 -2- 2017. 9. 2. 19:51



동양인 첫 바티칸 변호사 "후회도 했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 길 선택"



인문 분야 베스트셀러 1위 '라틴어 수업' 펴낸 한동일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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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로마법 한국어 사전을 만들고 있는 한동일 변호사는 “강의 없는 날엔 오전 7시부터 밤 11시까지 꼬박 책상에서 일한다”고 했다. 예수고난수도회를 나온 지 20년 넘었지만 그의 집은 그곳처럼 고요했다. 가장 좋아하는 라틴어 구절을 묻자 라틴어 대신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로 시작하는 가수 안치환의 ‘고백’을 꼽았다. 한국어가 그리울 때 불렀던 노래라고 했다. /김지호 기자


한동일(47) 신부는 국내 최초의 바티칸 변호사다. 지난 2010년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Rota Romana)'의 바티칸 사법연수원을 졸업했고 변호사 자격시험을 통과했다. 바티칸이 변호사를 뽑은 지 700년이 넘었지만 선발하는 변호사 수가 매우 적어 그가 930번째 변호사다. 연수원 과정을 마치더라도 변호사 자격시험 합격률은 5% 안팎이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이자 최초의 동양인 바티칸 변호사인 그는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 출신 변호사가 많은 로마에서 유명인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색다른 강의를 하는 교수로 소문이 나 있다. 지난 2010년부터 7년간 서강대에서 가르친 '라틴어' 강좌 때문이다. 그전에도 같은 과목이 있었지만 단어와 문법을 가르치는 단순한 외국어 강좌였다. 그가 교편을 잡은 뒤 수업은 180도 바뀌었다. 학생들이 꼽은 수업의 가장 특별한 점은 중간고사 과제다. 첫 수업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한 쪽 분량의 중간고사 과제를 내준다. 주제는 '데 메아 비타(De mea vita)', 즉 '내 인생에 대하여'다. A4용지 한 쪽 분량의 짧은 과제이지만 학생들은 깨알 글씨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적어낸다. 그렇게 그가 받은 학생들의 인생이 2000장을 넘는다.

첫 학기 수강생은 24명이었지만 6년 뒤 그의 라틴어 수업을 듣겠다는 학생은 200명을 넘었다. 수강신청을 하지 못한 서강대생들뿐만 아니라 근처 연세대와 이화여대 학생들, 다른 지역 대학생들, 지역 주민들까지 청강하겠다며 그의 강의실을 찾아왔다. 그는 학생들로부터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주인공 키팅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신부·교수·변호사 1인 3역 인생

최근 그가 강의록을 엮은 책 '라틴어 수업'(흐름출판 刊)을 펴냈다. 강의의 인기는 책으로 이어졌다. 두 달 만에 5만부가 팔렸고 지난 7월엔 알라딘 인문 분야 베스트셀러 1위,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9위에 올랐다. 교수이자 신부, 변호사에 베스트셀러 저자가 된 그를 그의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만났다. 검은색 사제복 차림을 기대했지만 그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신부님, 교수님, 변호사님 중에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셋 다 맞으니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선생님이 좋겠습니다. 학생들을 만날 때 가장 행복하거든요."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는 무슨 일을 하나요?

"근대국가가 생기기 전에는 교회 법원이 분쟁을 해결하는 유일한 곳이었어요. 민사, 형사, 행정이나 가사 소송까지 모두 교회 법원에서 다퉜지요. 종교와 국가의 관할권이 분리되고 나서 유럽 국가들은 둘 사이에 걸친 애매한 문제를 누가 판단할 것인지에 대해 정교조약을 맺었어요. 그 중 몇몇 국가와 맺은 조약 중 '교회가 내리는 판결에 대해 국가에서도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는 조항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탈리아인 부부가 이혼, 즉 가톨릭 표현으로는 혼인을 해소하고 싶을 때 각국 법원에서 이혼 절차를 밟은 뒤 교회 법원에선 혼인 해소 절차를 한 번 더 밟아야 해요. 그럴 바에 교회 법원에서 한 방에 해결하는 게 나은 거죠. 요즘은 사건 대부분이 혼인 해소 같은 가사 사건이에요."

―바티칸 변호사는 대부분 사제입니까.

"저처럼 신부인 경우는 극히 드물어요. 오히려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 각국에서 라틴어가 익숙한 학생들이 모이죠. 일단 라틴어를 자유롭게 할 줄 알아야 하니까 변호사 자격증까지 따기가 만만치 않지요. 1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외국에 있는 것도 외롭고 힘들고요."

'숨마 쿰 라우데'가 되기까지

그의 서재에는 가로 2m쯤 되는 책상에 라틴어와 영어로 된 책 대여섯 권이 펼쳐 놓여있었다. 언뜻 보기에 깨알 같은 글씨가 빽빽이 적혀있었다. 그는 780쪽짜리 로마법 한국어 사전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책장 한쪽엔 그가 2001년 로마 유학길에 올라 교황청립(敎皇廳立) 라테란 대학교에서 교회법 학위를 받은 증서가 보관돼 있었다. 몇몇 증서엔 최우등을 표시하는 'Summa cum laude(숨마 쿰 라우데)'라는 글씨도 눈에 띄었다.

―공부를 얼마나 해야 바티칸 최우등생이 될 수 있습니까.

"데펙투스, 메리툼(defectus, meritum). 단점과 장점이라는 라틴어예요. 강의 시간에 단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장점이 단점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해요. 항상 저를 예로 들지요. 어릴 적 집이 쌀 살 돈이 없을 만큼 가난했어요. 1980년대 이야기예요. 서울 제기동 3층짜리 연립주택 옥탑 단칸방에 부모님, 지적장애와 언어장애가 있는 누나와 함께 살았어요. 늦둥이라 큰형님들은 이미 분가를 했었고요. 실향민인 아버지는 사업이 망한 뒤 매일 술을 드셨고 그런 날엔 집안 살림들이 내던져지고 망가졌고요. 어머니가 시장에서 도라지를 팔아 겨우 입에 풀칠했어요."

―집이 가난했다는 단점이 장점이 됐습니까.

"학비 내는 일이 밀리기 일쑤였고 아무도 우리 집에 데리고 올 수 없을 정도로 창피했어요. 친구도 한 명 없었죠. 집이 시끄러울 때마다 열여덟 살, 열여섯 살 차이 나는 큰형님들이 두고 간 성문종합영어 책을 봤어요. 참고서 한 권 살 돈 없는 집에 활자라곤 그 책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책 안에 온갖 명문들이 적혀있었어요. 마크 트웨인부터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까지 전 세계가 담겨 있는 그 책이 제 유일한 피난처였어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느냐, 그때부터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점점 외톨이가 돼 갔고요."

에스프레소와 포도주 반 잔의 추억

왕따 생활은 신학생 시절을 거쳐 로마에서도 계속됐다. 이탈리아어는커녕 영어도 더듬는 학생에게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대학원 공부를 위해 그가 고안해 낸 방법은 모든 과목을 한글로, 영어로, 이탈리아어로 한 번씩 보면서 내용과 언어를 몽땅 외우는 방법뿐이었다. 연수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니 친구를 사귈 기회도 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했다는 건가요?

"연수원에선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등 각종 언어로 올라오는 소장을 라틴어로 해석하고 보고서를 쓰는 과제가 밀려와요. 라틴어 문법 하나만 틀려도 보고서에 빗금이 날아다닙니다. 30점 만점에 18점 이상을 받아야 통과인데 한 번 유급을 했어요. 마음이 급했죠. 고학생 신분인지라 빨리 과정을 마쳤어야 했거든요. 누릴 수 있는 유이(有二)한 사치는 하루에 쓸 수 있는 용돈 1유로 중 70센트짜리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는 것과 밤에 기숙사 지하 식당에 몰래 가서 싸구려 포도주 반 잔을 훔쳐 마시는 것뿐이었다니까요(웃음). 한국 식당에 너무 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고 친구도 없어 갈 수가 없었죠."

―유일한 동양인이면 인종차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사제복과 로만 칼라를 입지 않으면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무시를 당하죠. 지나가기만 해도 '멍청한 놈'이라는 욕을 들었고요. 그래서 오기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들이 무시하는 동양인도 그곳에서 제일 어렵다는 대법원 변호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기숙사 생활하는 동안 침대에 누워서 자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습관이 돼버려 지금도 침대에서 자지 않고 소파에서 쭈그려서 자거나 책상에서 엎드려 자요."

후회도 했지만 당시엔 최선의 선택

지난 2010년 그가 귀국할 때쯤 서강대 한 노교수가 가르치던 라틴어 수업 강사 자리가 공석이 됐다. 한 변호사가 선천적 심장혈관기형 진단을 받고 병원 근처에만 머무를 때였다. 소식을 들은 그가 덥석 강의를 맡았다. 그렇게 시작한 강의가 6년 동안 이어졌다. 로마에서 해야 할 일들은 방학 기간에 몰아서 했다. 지난 가을학기부터는 연세대에서 '유럽법의 기원' 강의를 맡아 법학·법무대학원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바티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지 않고 한국에 있어도 되는 건가요?

"교황청 대법원에서는 로마에 계속 머무르면서 더 많이 일하길 원해요. 하지만 학생들을 만나는 게 저한테 아주 큰 보람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소한 유럽법, 교회법을 알릴 수도 있고요."

―독특한 인생에 후회는 없습니까.

"로마에서 항상 한국이 그리웠어요. 왜 내가 이 길을 택했는지 눈물 흘리면서 후회할 때도 있었고요. 그런데 아마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전 이 길을 택할 거예요.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너희가 후회하는 몇몇 선택들도 당시엔 최고이고 최선이었을 것이라고요. 시험 전에 공부 안 했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아마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안 할 것이다, 그 당시 '공부할까 말까'했던 너의 마음과 머리에서 무수한 고민이 벌어졌었고 결국 감정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안 하는 것으로 결론 낸 것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외롭고 힘들었지만 아마 저도 다시 돌아가면 또 이 길을 택할 거예요."





한동일(44) 사무엘 신부 ‘그래도 꿈꿀 권리’ - 2014.6.27.동아  http://blog.daum.net/chang4624/7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