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40년 맞은 온양민속박물관 代 이어 운영하는 김은경 관장
"아버지는 아이들에게서 번 돈을 아이들을 위해 쓰고 싶다고 하셨어요. 재력가들이 고미술품을 모을 때 아버지는 급속도로 없어지는 민속 유물을 수집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지요."
지난 11일 충남 아산의 온양민속박물관. 김은경(64) 관장은 설립자인 구정(龜停) 김원대(1921~2000) 선생의 수집 철학을 들려줬다. "아이들에게 생명력 있는 전승 문화를 보여줘야 한다며 인분(人糞)을 퍼 나르는 똥바가지, 오래된 낫과 쟁기, 짚을 엮어 만든 개집까지 돈을 주고 샀다"고 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라 전통 생활용품이 빠르게 사라지던 시기였다.
지난 11일 충남 아산의 온양민속박물관. 김은경(64) 관장은 설립자인 구정(龜停) 김원대(1921~2000) 선생의 수집 철학을 들려줬다. "아이들에게 생명력 있는 전승 문화를 보여줘야 한다며 인분(人糞)을 퍼 나르는 똥바가지, 오래된 낫과 쟁기, 짚을 엮어 만든 개집까지 돈을 주고 샀다"고 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라 전통 생활용품이 빠르게 사라지던 시기였다.
![김은경 온양민속박물관장이 문인석 30여 점이 모여 있는 야외 전시장 한가운데에 섰다.](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810/23/2018102300067_0.jpg)
1978년 아동 서적 출판사인 계몽사 설립자 김원대 선생이 세운 이 박물관이 올해 개관 40주년을 맞았다. 현재 소장 유물만 2만여 점. 상설 전시실 3곳과 야외 전시장 등을 갖춘 대지 2만5000여 평의 사립 박물관이다. 개관 40주년을 기념해 '일상의 유산×유산의 일상'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수장고에 보관 중이던 개관 초기 설계도를 비롯해 김 선생의 유품 50여 점도 전시장에 나왔다.
김 관장은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휴지를 반으로 접어 다시 쓰라고 할 정도로 검소한 사람이었다"며 "사비를 털어 유물을 구입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김원대 선생은 1946년 계몽사 설립 후 여성 교육을 위해 1974년 고향 안동에 길원여고를 세울 정도로 교육에 관심이 컸다. "책으로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실물로 볼 수 있도록 박물관 설립을 계획하셨죠."
2006년 취임한 김 관장은 김원대 선생의 둘째 딸이다. 2002년 박물관이 운영난으로 문을 닫자 '내 대(代)에서 선친의 뜻이 끊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비를 털어 박물관을 살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개관 첫해 학생 50만명이 찾을 만큼 북적였던 박물관이 난방조차 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울컥했다"고 했다.
제주도에서 가져온 떼배, 전주에서 통째로 들고 온 듯한 대장간…. 김 관장은 주요 유물들을 소개하면서 "아버지는 백자 달항아리 자태에 반해 보름을 두고 보시다가도 다시 돌려보냈다"며 "'명품(名品)을 수집하기 시작하면 민속과 거리가 멀어진다'는 말씀을 늘 하셨다"고 말했다. 고려시대 청동 북인 금고(金鼓)나 조선시대 용문 촛대 등 지정문화재 10여 점을 보유하고 있지만, 개관 후 "박물관을 키우는 데 필요하다"는 주변 설득에 들여온 것들이다.
지금도 온양민속박물관 유물에는 '때 빼고 광내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손때도 민속의 일부"라는 김원대 선생의 신념 때문이다. 김 관장은 "목재 가구는 고목(古木) 결을 살리느라 닦아내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며 18세기 후반 작품인 '전주장(全州欌)'을 보여줬다. 사선으로 결이 난 짙은 갈색 장이 손때 묻어 반질거렸다. "사용 흔적이 남은 민속품이야말로 살아있는 역사라고 생각하셨죠."
김 관장은 "선친 뜻에 따라 명맥을 잇겠다"면서도 "옛 공간과 현재가 공존하는 박물관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앞으로 40년 더, 그 후에도 계속 3대(代)가 함께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으로 만들고 싶어요."
김 관장은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휴지를 반으로 접어 다시 쓰라고 할 정도로 검소한 사람이었다"며 "사비를 털어 유물을 구입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김원대 선생은 1946년 계몽사 설립 후 여성 교육을 위해 1974년 고향 안동에 길원여고를 세울 정도로 교육에 관심이 컸다. "책으로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실물로 볼 수 있도록 박물관 설립을 계획하셨죠."
2006년 취임한 김 관장은 김원대 선생의 둘째 딸이다. 2002년 박물관이 운영난으로 문을 닫자 '내 대(代)에서 선친의 뜻이 끊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비를 털어 박물관을 살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개관 첫해 학생 50만명이 찾을 만큼 북적였던 박물관이 난방조차 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울컥했다"고 했다.
제주도에서 가져온 떼배, 전주에서 통째로 들고 온 듯한 대장간…. 김 관장은 주요 유물들을 소개하면서 "아버지는 백자 달항아리 자태에 반해 보름을 두고 보시다가도 다시 돌려보냈다"며 "'명품(名品)을 수집하기 시작하면 민속과 거리가 멀어진다'는 말씀을 늘 하셨다"고 말했다. 고려시대 청동 북인 금고(金鼓)나 조선시대 용문 촛대 등 지정문화재 10여 점을 보유하고 있지만, 개관 후 "박물관을 키우는 데 필요하다"는 주변 설득에 들여온 것들이다.
지금도 온양민속박물관 유물에는 '때 빼고 광내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손때도 민속의 일부"라는 김원대 선생의 신념 때문이다. 김 관장은 "목재 가구는 고목(古木) 결을 살리느라 닦아내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며 18세기 후반 작품인 '전주장(全州欌)'을 보여줬다. 사선으로 결이 난 짙은 갈색 장이 손때 묻어 반질거렸다. "사용 흔적이 남은 민속품이야말로 살아있는 역사라고 생각하셨죠."
김 관장은 "선친 뜻에 따라 명맥을 잇겠다"면서도 "옛 공간과 현재가 공존하는 박물관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앞으로 40년 더, 그 후에도 계속 3대(代)가 함께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으로 만들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