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이야기

이생진(89) 시인 '무연고(無緣故)' - 2018.11.21.조선外

하늘나라 -2- 2018. 11. 22. 21:52



고독을 밥처럼 씹어먹고, 詩 한 수 읊는다오



[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의 시인, 구순 나이에 시집 '무연고' 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요? 천만에! 이제는 인생이 길어야 예술도 길어져요. 90세까지 시를 쓸 수 있는 비결은 건강입니다. 삼시 세끼 제 손으로 챙겨 먹고 설거지까지 해요. 남한테 의존하면 죽음이 점점 가까이 오는 법이지요."

시인 이생진
/장련성 객원기자
올해 아흔이 된 이생진〈사진〉 시인이 신작 시집 '무연고(無緣故)'를 냈다. 전국 3000여 개 섬 중 1000여 곳을 다녀 '섬 시인'으로 불린다. 대표작 '그리운 바다 성산포'처럼 섬과 바다를 노래했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 시집은 아흔을 앞둔 길목의 노인이 쓴 일기 같다. 팔과 얼굴에 핀 검버섯도, 지금 복용하는 약 리스트도, 독거 노인에게 가혹한 도시의 빙판도 전부 시의 소재다.

신작 '무연고'38번째 시집이다. 38권의 시집 서문을 모아 구순 특별 서문집 '시와 살다'도 함께 냈다. 1997년 출간된 첫 산문집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도 개정 증보판으로 나왔다. 청년 시인 못지않은 일정이다. 전국 곳곳으로 강연과 행사를 다니면서 매달 인사동 카페 '시가연'에서 시 낭송회도 연다. 그는 "갈 곳이 사라지는 시인들을 위한 섬 '인사도(島)'를 지키고 있다"고 했다.

흐려지는 기억 속에서 오늘을 붙잡는 시들이 이어진다. 시 '오늘이 여기 있다'에서는 "아내의 치마를 잡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가 내 곁을 떠난 것 같다/ 오늘의 치맛자락을 꼭 잡고 있어야 하겠다"라고 썼다. 그는 "글로 남겨놓지 않으면 내 존재가 사라지는 느낌"이라면서 "하루 동안 남긴 짧은 메모들을 모아 매일 저녁 쓰는 글이 내 존재를 말해준다"고 했다.

건강 비결은 하루 1만5000보씩 걷기. "매일 일어나 뒷산 둘레길을 걷고 1만5000보 지점의 식당에서 아침을 먹어요. 치매도 예방하기 위해 꼭 시를 읊으면서 걷습니다." 신간 시집을 보고 후배 시인에게 보내는 격려의 메시지도 저녁의 소소한 일거리다. 그는 "나도 시인이 되려고 발버둥치던 시절이 있었다"면서 "평가는 접어두고 '이 시가 좋더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꼭 보내준다"고 했다.

병원에서 아들과 건강검진 결과가 바뀐 줄 알았을 정도로 육체는 아직 정정하지만 '보이스피싱'만큼은 피해갈 수 없었다. 시 '보이스피싱'에는 사기 전화를 받고 현금을 세탁기에 넣어두고 집 비밀번호까지 순순히 털어놓은 경험이 담겼다. "시 한 수 건졌죠. 몇 천만원짜리 시예요. 그다음부터 보이스피싱 전화가 걸려오면 이렇게 답합니다. '이제 그만합시다…. 너무 늙은이 곯려대면 안 돼요.'"

시집 '무연고'
1929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섬과 바다를 좋아했다. 16세 때 해방을 맞이했고 6·25전쟁 때는 제주도 육군 훈련소에서 군 생활을 했다. 올레길이 생기기도 전에 제주 걷기 일주를 했고, 요즘 유행하는 '제주도 한 달 살기'도 먼저 시작했다. 그는 10여 년 전 제주도 식산봉 인근의 낡은 집에서 살았던 경험을 들려줬다. "어느 날 밤 사람이 바다에 빠져 자살했다며 경찰이 찾아왔어요. 오싹했죠. 나중에 그 바다 근처를 지나는데 방파제 콘크리트 틈을 비집고 핀 쑥부쟁이 꽃이 눈에 띄더라고요. 쑥부쟁이도 자살하지 않고 저렇게 살아가는데, 살 수 있을 때까진 살아야겠구나…."

평생 외롭게 섬을 떠돈 시인에게도 '고독'은 힘든 적수다. "90세까지 시를 쓰려면 고독을 잘 관리해야 해요. 고독을 밥처럼 씹어 먹고 그 에너지로 시를 씁니다." 지금도 고독이 찾아오면 섬으로 가서 시를 쓴다. 그는 "섬에서 시를 쓰면 물새도 날아오고 파도 소리도 밀려온다"며 "마치 내가 앉은 곳에 시가 몰려오는 것 같다"고 했다.




서귀포 칠십리 이생진 시 / 현승엽 노래  

게시일: 2018. 10. 14.

이생진 시인을 흠모하는 모임 인사島 珍欽慕(진흠모)에서는 이 노래가 막걸리에 비벼져 건배사로 불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