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희의 맛따라기-별난 대전 음식 5선
대전 사람에게 그곳 대표 음식이나 맛집을 물으면 “모르겠다”라거나 “없다”는 대답이 많다. 50대 초반의 대전 붙박이 한 사람은 “대전 음식은 꼭 대전 맛이다. 뭐라고 얘기하기 어려운 맛이다. 이것저것 많은데 꼭 찍어 말할 게 없다. 여기 말로 개갈 안 난다고 한다”고 했다. ‘개갈 안 난다’는 말은 일의 형세가 마뜩잖을 때 쓰는 충남 방언이다.
‘대전 방문의 해’ 맞아 찾아가보니
몽글몽글하게 엉긴 숨두부 별미
미꾸라지 국물에 생면·들깻가루
오징어찌개·호박고지·석이버섯
마치 고향처럼 안온한 맛과 느낌
대전의 어느 신문사가 몇 년 전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지역 대표 음식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결과는 칼국수 60, 구즉 묵 25, 두부두루치기 22, 냉면 6, 숨두부 4, 설렁탕∙닭볶음탕 각 2, 튀김소보로(성심당 빵)∙수육 각 1명으로 나왔다. 이 음식들에 대해 대전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은 대체로 시큰둥하다. 특별한 맛이 아니고, 어느 도시에나 있을 법한 음식 아니냐는 반응이다.
10대 후반 4~5년을 대전에 신세 지고 훌쩍 떠난 뒤 40년 넘게 서울살이를 하다 보니 문득 대전의 맛이 궁금해졌다. 게다가 시 출범 70년, 광역시(초기 6년은 직할시) 승격 30년이 되는 올해는 ‘대전 방문의 해’이기도 하다.
대전 음식에 대해 여러 달 탐문했다. 대전 출신 주변 사람들 의견을 듣고, 대전의 조리학과 교수와 2명의 업계 종사자에게 추천을 받았다. 지역 언론의 맛집 기사도 훑었다. 그렇게 9개 업소를 골라 홀로 30시간 동안 탐구하며 먹어봤다. 지명도가 아니라 대전 아니면 맛보기 어려운 이색 음식 5가지를 골라 다시 먹어보며 취재했다. 재료나 조리법이 새롭거나 별난 음식이고, 토속 재료를 친근한 음식으로 조리해 원초적 맛을 잘 살려낸 별미다.
현지인은 ‘대전 음식이 개갈 안 난다’고 했지만, 먹어보니 구뜰했다. 맛과 느낌이 고향처럼 안온했다. ‘구뜰하다’는 보기보다 맛이 제법 구수하여 먹을 만하다는 말이다.
◇평양숨두부집: 순두부가 아니라 숨두부다. 사전은 순두부의 충청∙평북∙황해 방언이라고 설명한다. 두부를 만들면서 끓인 콩물에 간수 지르는 것을 관서지방에서는 ‘숨 준다’고 한다. 그래서 숨두부. 간수를 붓고 콩 단백질이 몽글몽글 엉기면 그 상태로 덜어내 그대로, 또는 양념간장을 얹어 먹는 게 숨두부다(5000원).
대전 숨두부는 이름도 다르지만, 질감도 서울 순두부와 다르다. 매끈한 게 아니라 알갱이 같은 게 구름처럼 엉겨 있다. 숨두부 맛의 절반이라 여겨지는 양념간장은 조선간장∙양조간장을 섞고 참기름∙고춧가루∙마늘∙대파를 넣어 만든다. 예전엔 간장에 삭힌 고추를 다져 넣었는데 요즘 하지 않는다.
대전 음식에는 실향민의 영향이 저변에 배어 있다. 이 집도 한국전쟁 때 평양에서 피란 온 할아버지가 전쟁 중 창업해 손자가 물려받은 지 31년 됐다.
◇논두렁 추어칼국수: 미꾸라지를 삶아 뼈를 발라내고 남은 국물에 칼국수 생면과 들깻잎∙부추∙애호박∙파를 넣고 끓였다(7000원). 여주인의 여동생이 처음 상품화한 음식이다. 국물은 미꾸라지 맛이 진하고 들깻가루가 들어가 농도가 짙다. 양념은 맛으로 보면 된장∙고추장∙고춧가루가 들어간 듯하다. 동행한 사진기자는 첫술을 뜨자마자 “국물이 죽이네 이거” 하고 감탄했다. 고춧가루가 들어가는 건 금산 추부면을 대표로 하는 충청도식 추어탕의 특징이다. 음식을 처음 상품화한 여동생 시댁이 금산이라고 한다.
식탁에 산초∙후추는 있는데 초피가루는 없다. 원하면 일회용 포장한 걸 준다. 산초와 제피는 아주 다른데 구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진짜 산초가루를 식탁에 둔 추어탕 집은 처음 봤다. 산초가루는 산초의 씨앗, 초피가루는초피 열매의 껍질을 간 것이다.
◇소나무집: 추천한 현지인은 “음식을 보면 어이없는데 먹어보면 맛있어서 어이없다”고 했다. 메뉴는 오징어찌개(오징어국수)뿐이다. 국물에 오징어 몇 점, 저민 총각김치를 넣은 멀건 찌개(4000원)다. 반찬은 저민 총각김치 하나. 한 가닥 맛보니 찌개는 먹을 수 있을까 싶게 시다. 그것까지 찌개에 쏟아 넣는 게 여기 방식이다.
끓는 동안 두부부침(2000원)에 총각무와 오징어 건져 곁들여 먹는다. 찌개가 끓자 맛이 놀랍게 변했다. 한국 맛의 원형질을 생각나게 하는 구뜰한 맛이다. 국물에 반쯤 삶은 칼국수(1000원)를 넣어 끓여 먹고, 남은 국물에 밥(1000원)을 볶아 먹는 게 이 집 풀코스다.
매년 12월 해남 총각무 10t을 사들여 한 달간 김치를 담가 1년 숙성해 쓴다. 창업 50년 동안 업소 앞 사거리 둘레 건물을 다 사들였다. 맛의 물증이다.
◇맑은골호박꼬지: 호박고지에 김치와 떡국 떡 약간, 돼지고기 앞다릿살을 넣고 끓인 찌개(8000원)가 주력 메뉴다. 찌개 국물이 달다. 오래 끓이면 더 맛있어진다. 처음엔 좀 싱거운 듯하지만 끓으면서 간이 맞게 되고 말린 호박고지에서 즙이 우러나 맛은 진해진다. 조각마다 씹는 느낌이 다른 호박고지 질감도 끓으면서 쫀득쫀득, 부들부들, 물컹물컹 계속 변한다. 변하는 맛을 느끼면서 먹는 재미가 있다. 고기를 호박고지로 싸고 양념장 얹어 먹으면 안주로도 좋다.
어감이 강한 ‘호박꼬지’로 표기한 상호에 이 음식에 대한 주인의 의욕이 엿보인다. 주방을 지키는 안주인의 남편은 ‘호박고지 전도사’를 자처한다. 해마다 옥천∙영동∙곡성∙해남 등지에서 시골 할머니들이 조선호박을 햇빛에 말린 호박고지를 수집해 지금도 저온 창고에 5t 정도를 저장해뒀다고 한다.
◇석이원: 석이버섯 전문점이다. 석이전복백숙(6만원), 석이버섯전골(3만~4만원), 석이멍게비빔밥(8000원) 등 모든 음식에 석이가 들어간다. 주인 이상권(58)씨는 “전국에서 석이 전문점은 우리 말고는 없더라”고 했다. 그는 대체의학을 전공해 학사∙석사를 했다. 그 과정에서 석이를 활용한 음식과 술(석로주)을 개발했다.
백숙∙전골의 국물은 보약이나 다름없다. 오장에 좋은 한약재 5가지씩 25가지를 포함해 모두 30가지 약재를 넣고 달인 물이기 때문이다. 갈색 맑은 국물은 약 냄새는 없지만 맛은 시원하고 구수하다. 오리∙전복∙문어를 쌓은 위에 고명으로 올린 검은 조각이 석이다. 먹으면서 음식과 보약 사이, 맛도 있고 몸에도 좋은 보양식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전통주 사업도 하는 이씨는 “일본에 가서 내 돈 주고 내 술 사 마시는 게 꿈”이라고 했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lee.tackhee@joins.com
전직 신문기자. 기자 시절 먹고 마시고 여행하기를 본업 다음으로 열심히 했다. 2018년 처음 무소속이 돼 자연으로 가는 자유인을 꿈꾸는 자칭 ‘자자처사(自自處士)’로 살고 있다.
전직 신문기자. 기자 시절 먹고 마시고 여행하기를 본업 다음으로 열심히 했다. 2018년 처음 무소속이 돼 자연으로 가는 자유인을 꿈꾸는 자칭 ‘자자처사(自自處士)’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