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이야기

은희경(57) 소설가 '중국식 룰렛' - 2016.7.1. 조선 外

하늘나라 -2- 2016. 7. 3. 22:18



이름 모를 위스키 한잔, 운명을 비추다



[새 소설집 '중국식 룰렛' 낸 은희경]

동명소설 포함 短篇 6편 묶어
"박경리 부음·세월호 접하면서 소설·삶 대하는 태도 유연해져
다시 시작하듯 장편 준비중… 등단 21년, 아직 소설 어렵네요"


싱글몰트 위스키 세 잔. 각기 다른 술이 담긴다. 값은 같고, 이 중 하나를 골라 마신다. 싸구려일 수도, 최상급일 수도 있다. 술의 정체는 끝내 불문에 부쳐진다. "라벨을 숨긴 채 찾아오는 행운과 불운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선악을 구분할 수 없지만 인간을 조금씩 바꿔놓는 우연요."

새 소설집 '중국식 룰렛'(창비)을 낸 소설가 은희경(57)이 말했다. 2008년 발표한 동명소설을 중심으로, 신발·가방·책 등 구체적 사물에 대한 단편 여섯 편을 골라 묶었다. "이전엔 관계에서 생기는 인간적 오해와 상처만 다뤘는데, 익숙한 물건에서 줄거리를 전개하는 방식도 쓰는 맛이 있더라고요." 소설집의 시작은 '중국식 룰렛'이었다. 후배들과 소설 속 술집과 비슷한 곳에 들렀다가 집필을 마음먹었다. 네 명의 사내가 위스키 바에 모여 무슨 술이 담겼는지 알지도 못한 채 잔을 털어 넣는다. 병에 걸리고 돈과 사랑의 영역에서 실패한 뒤 스스로의 불행을 자조하지만, 이들은 그저 '조금' 불행할 뿐이다. "싱글몰트의 2% 정도가 숙성 과정에서 휘발돼요. '천사의 몫'이라고 하죠. 사람의 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조금 날아가는 것뿐이죠."

30일 서울 연남동의 한 싱글몰트바에서 만난 은희경은 “술과 책은 일상에서 천칭의 좌우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30일 서울 연남동의 한 싱글몰트바에서 만난 은희경은 “술과 책은 일상에서 천칭의 좌우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표제작뿐 아니라, 이번 소설집엔 수첩 분실('장미의 왕자'), 버스 전복사고('대용품') 등의 우연이 자주 등장한다. "삶은 종잡을 수 없는 거죠. 하지만 불행으로만 끝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는 평소 빈틈없는 비관주의자를 자처해왔다. "예전엔 인생이라는 게 밧줄에 꽁꽁 묶인 채 검은 물에 떠내려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이젠 그렇게 떠내려 보내기만 해선 안 될 것 같아요. 그렇게 캄캄한 소설만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소설관을 흔든 것은 일련의 죽음이었다. '중국식 룰렛'을 집필하고 있던 2008년, 소설가 박경리의 부음을 접했다. '대용품'을 쓰고 있던 2014년엔 세월호 사건을 맞닥뜨렸다. '별의 동굴'을 쓰던 작년엔 작가 본인이 심장 부정맥으로 병원 신세를 졌다. "소설가로서의 마음가짐에 대해 질문을 많이 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유연해진 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손자를 얻었다. "작가로서 상상의 외연이 더 넓어질 것 같다"고 했다.

결론을 미리 정해놓지 않는다. 그러니 글이 끝내 어떻게 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안다. "시작할 때랑 마무리할 때랑 전혀 다른 줄거리가 돼요. 근데 쓰고 나서 보면 '내가 원래 이걸 쓰고 싶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등단 21년, 아직도 소설이 어렵다고 했다. 쓰다 체력이 달릴 때마다, 그는 2005년 낸 장편 '비밀과 거짓말' 주인공처럼 혼자 발 베니(Balvenie) 같은 싱글몰트를 마신다. "싱글몰트엔 정제되고 까다롭고 고독한 느낌이 있다"고 했다. 그것이 소설에 대한 은유처럼 들렸다.

최근엔 여대생 기숙사를 배경으로 하는 장편 연재를 준비 중이다. "소설 공부 새로 하는 기분이에요. 제 첫 장편도 다시 꺼내 읽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다시 시작하려고요." 그가 술잔에 입술을 갖다 댔다.





은희경(52) 소설가 『생각의 일요일들』- 2011.9.1.중앙  http://blog.daum.net/chang4624/3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