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이야기

고순이(84)-한철호(58)-한정민(28) ‘밀레’ 3代-2017.10.24.동아

하늘나라 -2- 2017. 10. 24. 21:42




50년전 뜨개질 양말, 지금은 아웃도어의 첨단패션



아웃도어 ‘밀레’ 경영하는 3代

순이-한철호-한정민 씨
17일 서울 종로구 삼청로 양말 숍 ‘스테이 골드’에 밀레에델바이스홀딩스의 3대가 모였다. 왼쪽부터 한정민 실장(28), 고순이 회장(84), 한철호 대표(58). 고 회장은 “털실로 등산양말을 짜며 회사를 차렸는데, 미대 나온 손녀는 디자인 양말을 만드는 게 신기하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나도 명함 하나 주라.” 

손녀딸이 기자에게 건네는 명함을 보더니 옆에 있던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도 웃으며 따라 했다. “나도 하나 줘.” 손녀딸이 말했다.

저도 오늘 처음 나온 명함이에요.”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로에 새로 생긴 한 양말 가게에 3대(代)가 모였다. 아웃도어 브랜드 밀레를 운영하는 밀레에델바이스홀딩스 창업자 고순이 회장(84), 한철호 대표(58), 한정민 실장(29)이다. 한 실장은 최근 패션 양말 브랜드스테이 골드’를 론칭했다. 

여자가 등산용품을 한다니까 1980, 90년대에는 인터뷰하자는 곳이 많았어요. 나서기 싫어서 한 번도 안 했는데 오늘은 얘(손녀딸)가 나오라니까…. 아들 말은 안 들어도 손녀 말은 들어야죠(웃음).” 


고 회장의 언론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한국 아웃도어 밀레가 여성의 손에 탄생했다는 것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 회장이 털실로 등산 양말을 짜기 시작한 게 연간 매출액 3000억 원대 기업의 시작이었다. 3대가 들려준 스토리는 한국 섬유 산업과 아웃도어 산업의 산 역사였다. 제각기 다른 3색 원동력으로 삶과 기업을 이끈 할머니, 아버지, 청년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1972년 11월 산악 전문 잡지에 실린 한고상사의 ‘에델봐이스’ 등산양말 광고. 밀레에델바이스홀딩스 제공

  
1세, “잠 못 자게 하는 책임감” 

미술 공부한 손녀딸이 양말 사업을 한다기에 깜짝 놀랐어요. 나를 닮았나. 왜 또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고 회장은 사업을 “잠 못 이루는 길”이라고 했다. 기업 하는 사람들에겐 주말도, 연휴도, 휴가도 없고 늘 걱정뿐이라고 했다. 

이제 경영엔 참여하지 않지만 다 알죠. 아들이 얼마나 힘들지. 첨엔 가족들 생계 때문에 일을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임직원들과 그 가족 생계의 무게까지 얹혀져요. 잠이 오겠어요? 

밀레의 전신은 1966년 설립한 한고상사다. 서울 은평구 수색지역에 살던 고 회장은 그해 본격적으로 가내수공업을 시작했다. 33세 젊은 엄마였던 그는 손재주가 좋았다. 일본 책을 사 공부한 뒤 털실로 남매 옷을 해 입혔다. 6·25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넘었지만 제대로 된 기성복이 없던 시절이었다. 고 회장이 만든 아동 스웨터 디자인이 예쁘다고 동네에서부터 소문이 났다. 산을 좋아하던 남편을 위해 등산 양말도 직접 털실로 짰다. 

“1960년대에는 아웃도어라는 말이 없었어요. 알음알음 산에 다니는 게 사람들 취미라면 취미였죠. 시장에서 파는 양말은 엉망이었어요. 하루 만에 구멍이 났죠. 털실로 등산 양말을 짜기 시작하니 여기저기 달라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남편인 고(故) 한용기 전 회장서울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대학 강사로도 일했지만 월급만으론 생계가 쉽지 않았다. 고 회장은 털실을 더 사서 이웃 주민들에게 나눠 주며 같이 양말을 만들자고 했다. 일당도 쳐줬다. 그렇게 만든 양말이 금방 팔려 나갔다. 아예 니트를 짜는 기계를 집에 들여왔다. 남대문에서 유명한 양말이 됐다.

회사 이름은 부부의 성인 한씨, 고씨를 따 한고상사로 지었다. 기자가 ‘고한상사’가 맞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손녀딸도 맞장구쳤다.

남편이 머리가 좋아서 에델바이스라는 상표를 부착해 팔자고 했어요. 브랜드 개념을 그때 이미 도입한 거죠. 우리가 1970년대 산(山) 잡지에 양말로는 거의 처음 광고한 기업일걸요? 

한고상사는 에델바이스를 상표로 등록했다. 창업 6년 만인 1972년 잡지 광고에는 ‘가볍고 질긴 에델봐이스(에델바이스의 당시 표기) 양말은 산을 정복할 수 있는 벗이 되어줄 것’이란 문구가 쓰여 있다. 판매처도 신세계백화점, 미도파백화점, 코스모스백화점 등 다양했다. 한고상사는 1970, 80년대에 국내 최초로 ‘쿨맥스’ 등 신소재를 도입한 아웃도어 업계의 선도 기업이었다. 

“공장의 ‘’자도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식구(임직원)들이 늘어나니 자꾸 새로운 걸 개발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 내 책임이잖아요. 일본에서 신소재도 들여오고 디자인도 바꿔보고 그랬죠. 한동안 고어텍스 소재도 우리만 팔 정도였으니까요.”

2세, “성장을 위한 모험의 연속” 

한 대표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의 창업을 지켜봤다. 모자와 스웨터로 사업은 확장돼 갔다. 한국외국어대를 졸업하기 직전 해인 1984년 그는 범양상선에 입사했다. 하지만 3년 만에 그만뒀다. 부친이 1985년 작고하면서 어머니를 돕기로 결심한 것이다. 회사에 합류한 1987년은 한 대표가 28세 때다. 당시 한고상사 매출은 3억 원, 종업원은 30여 명이었다. 

한 대표의 입사 얘기를 듣던 중 고 회장이 대뜸 “아들이 우리 회사에 입사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러곤 말을 이었다. “일본은 그런(가업을 잇는) 분위기가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자식이 부모보다 더 나은 일을 하길 바라지 않나?

한 대표가 “아들이 폼 나는 대기업에 다니길 원하셨던 것”이라며 웃었다.

고 회장의 걱정과 달리 모자(母子)는 잘 맞는 사업 파트너가 됐다. 한 대표는 경영 2세지만 사실상 동업자나 다름없었다.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아웃도어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보고 등산 조끼 등 의류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1990년에는 에델바이스를 토털 아웃도어 브랜드로 새롭게 론칭했다.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사업도 잘나갔다. 대기업에 아웃도어 의류를 납품하는 비즈니스다. 한 대표 입사 후 10년 만에 회사 매출은 100억 원대로 늘었다. 그야말로 고속 성장이었다.

그때 외환위기가 터졌다. 

에델바이스는 잘나갔는데, OEM에서 문제가 터졌어요.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를 내니 돈은 못 받고 창고에는 재고만 쌓여 갔죠.”

고 회장과 한 대표는 날마다 부도 걱정에 시달렸다. 한 대표는 직접 백화점 매대에서 OEM 물량 재고떨이에 나섰다. 한 대표는 OEM 사업은 위기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브랜드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1921년 론칭한 프랑스 정통 아웃도어 브랜드 ‘밀레’의 라이선스 사업을 하기로 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프랑스 본사와 계약을 맺었다. 10년 후인 2009년, 이번엔 유럽이 금융위기에 시달렸다. 본사에서 한국 상표권을 아예 인수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다. 2009년 3월 2일 원-유로 환율은 유로당 1979.78원까지 치솟았다. 한 대표는 고민했다. 

인수 금액이 100억 원을 훌쩍 넘었어요. 모두 반대해 잠을 못 이루며 고민했죠. 하지만 앞으로 성장할 아웃도어 시장, 로열티를 계산해 보면 인수가 답이더라고요.”

2004년 대표이사에 오른 이후 한 대표가 감행한 가장 큰 모험이었다. 2009년 4월 상표권을 인수하기 전 회사 매출은 650억 원 수준이었다.

이 모험으로 밀레는 크게 도약했다. 한국 아웃도어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밀레의 연간 매출액은 2014년 4000억 원까지 올랐다. 

국내 아웃도어 시장은 내수 불황과 유행의 변동으로 2015년부터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밀레 매출액도 지난해 3200억 원 수준에 머물렀다. 1998년 외환위기도 넘겼는데 그래도 이 정도는 가볍게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과거는 추억이지만 현재는 진행형이니 지금이 더 어렵죠.(웃음) 앞으로 아웃도어는 인도어(실내)와 대비되는 모든 바깥활동을 총괄하는 개념이 될 거예요. 규모에 상관없는 새로운 틈새시장을 찾고 있어요.” 

3세, “재미와 즐거움이 원동력” 
  
한 대표의 장남인 한승우 밀레 브랜드전략본부장(31)은 온라인 사업과 젊은층 공략, 밀레 클래식 등 신규 라인 확장 전략을 맡고 있다. 오빠와 달리 한 실장은 가업의 뿌리인 양말로 신규 사업을 시작했다. 

아버지 한 대표는 “양말은 패션의 ‘끝판왕’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양말이 너무 싸게 팔려서 공장조차 거의 사라졌다”고 했다. 

할머니도 아들의 말에 힘을 보탰다. “오죽하면 (거지) 발싸개라는 말이 나왔을까. 양말을 비하한 거죠. 사실 중요한 소품인데요.

아버지와 할머니의 지원사격을 받은 한 실장은 “요즘 양말에 포인트를 두는 스타일링이 확산돼 미국에선 ‘양말은 새로운 넥타이다’라는 말도 나온다. 스테이 골드 론칭으로 양말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스테이 골드 양말 중 30%는 일본의 고급 니트 공장에서 만든다. 최근 남성 바지가 짧아지고, 여성도 운동화를 즐겨 신으면서 명품 업체들도 다양한 양말을 내놓고 있다. 60만, 70만 원대 양말도 있다. 

스테이 골드란 브랜드는 한 실장 부부가 영화 ‘아웃사이더’(1983년)를 보다 아이디어를 냈다. 주인공의 대사이자 스티비 원더의 노래로도 나온 말이다. 한 실장은 “주인공이 죽기 전에 친구에게 ‘젊음의 찬란함을 그대로 간직하자’, ‘철들지 말자’는 뜻으로 한 말이다. 반짝반짝한 젊음을 간직하자는 뜻으로 지었다”고 소개했다.

3대 인터뷰 말미에 고 회장에게 여성 경영인 1세대로 젊은 여성들에게 조언을 부탁했다. 

그냥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책임감 때문에 열심히 하다 보니까 그게 습관이 돼 지금도 잘 못 놀아요.” 고 회장은 젊은층의 ‘즐기자’는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요즘 젊은이들은) 진짜 이해가 안 가죠”라며 고개를 저었다.

20대의 한 실장은 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웃었다. 환갑을 앞둔 한 대표가 나섰다. “어머니 세대는 이해를 전혀 못 하고 우리 세대는 이해가 가면서도 가끔 못마땅하고, 딸 세대는 그냥 좋아하는 거 즐기면서 살고 싶다는 거죠.”


인터뷰가 끝난 후 한 실장은 직접 디자인한 양말을 보여줬다.

저는 어릴 때 발에 상처가 있었고 그게 콤플렉스였어요. 그걸 가리느라 샌들도 안 신고 양말을 사들이기 시작했죠. 양말 ‘마니아’가 된 거예요. 집에 100켤레는 넘어요. 좋아해서 양말 사업을 해보고 싶었던 거예요.”

아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하는 것이 할머니가 말한 ‘열심히’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듯했다. 3대의 경영철학은 다른 듯하면서도 많이 닮아 있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