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책,그림

[스크랩] 보통이 최고다 - 장영희

하늘나라 -2- 2016. 7. 10. 08:51
      
      
      아무리 생각해도 어렸을 때의 나는 소위 말하는 “천재”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받은 IQ 검사에서 당시 세계에서 학생 수가 제일 많다는 종암초등학교에서 IQ가 전교 2
      등으로 153 이었고 , 공부도 학교에서 손꼽힐 정도로 썩 잘했다. 적성 검사를 해보아도 
      무슨 분야든 적격으로 판정을 받았다. 그 뿐인가,  예술적 재주도 많아서 글짓기 대회에
      서 학교 대표로 나가 상도 타고, 세계 아동 미술전에 나가 입상해서 신문에 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지만, 심지어는 학교 주최의 작곡 대회에서 무심
      히 음표 몇 개를 그려 넣고 작곡 상을 타기도 했다. 
      한마디로 체육만 빼고는  못하는 것이 없었고, 성적표에는 항상 “머리가 총명하고 다방면
      에 재능 있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선천적 재능은 후천적 게으럼
      과 무관심으로 인해 점차 사라져 갔다. 수술을 많이 받다 보니 자연히 전신 마취를 많이
       하게 되었고, 전신 마취는 원래 지능 발달에 좋지 않다더니 어른이 될 즈음에는 아마도 
      IQ 가 겨우 두 자릿수 모면할 정도가 돈 듯하다. 게다가 지금은 두뇌의 자연적 노화 현상
      과 겹쳐 지난 주에 읽은 책의 주인공 이름도 잘 생각이 안 난다. 그림에 관한 관심은 중학
      교 때까지 지속되다가 시들해졌고, 고등학교 들어가고 이제까지 붓 한 번 들어 본 적이 없
      다. 요새는 누군가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며 보여 줘도 진짜 잘 그린 것인지 아닌지,
       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 수 없고, 내 의견을 물어 오면 그저 “공간 처리가 잘 됐
      다”는 말로 모면할 뿐이다. 
      음악적인 재능(어차피 이 재능은 선천적으로도 타고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 은 그보
      다 훨씬 먼저 쇠퇴했다. 초등학교 때 동생들이 모두 피아노 레슨을 받는데 오른손을 못 써 
      포기해야 했을 때도 어머니는 가슴 아파하셨지만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지금 내가 갖
      고 있는 유일한 음악적 지식은 그저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
      는 정도이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다른 친구들처럼 클리프 리처드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에 심취하거나 환호한 적도 전혀 없다. 노래를 불러야 하는 자리에서는 슬쩍 꽁무니를 
      빼는 것은 물론, 2층에서 동생이 오페라를 틀면 듣기 싫어 문을 닫고,  학생들이 주는 그 많
      은 CD는 뜯어 보지 않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선천적으로 어느 정도 문재-文才-를 타고났다면 몇십 년 동안 문학을 공부하면서 
      그 재능을 갈고 닦아 지금쯤 썩 괜찮은 작품 하나 쓸 수 있음직도 한데, 언제나 남이 써 놓
      은 작품만 이렇다 저렇다 비판하고 트집만 잡을 뿐, 시나 소설 한번 써 보라고 하면 꼼짝 없
      이 첫 문장부터 막힌다. 또 언어적 문제도 심각하다. 어차피 영어는 중학교 들어가서 처음 
      배웠으니 한국어가 더 편한 것은 말할 나위 없지만  전공이 영문학이다보니 아무래도 영어
      로 글을 쓰는 일이 많아 언어적으로도 그야말로 죽도 밥도 아닌 어중간한 신세가 되어 버렸
      다. 완벽한 이중 언어자들이나 통역자들은 머리 속에 언어 채널 두 개가 별도로 있는지 찰칵 
      돌리기만 하면 두 가지 언어가 술술 잘도 나오는데, 내 머리 속에는 항상 언어의 주파수가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말을 할 때 걸핏하면 영어 단어가 튀어나오는가 하면, 
      글을 써도 문장이 주어와 동사를 철칙적으로 찾는 영어식 문장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쨌거나, 다방면에 뛰어난 ‘천재’ 일 수 있었던 내가 이렇게 그저 그런 보통 사람이 된 데
      는 물론 나의 게으럼이 주된 이유이지만, 부모님의 교육 철학도 한몫 했다. 부모님은 우리
      가 자랄 때 한번도 ‘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말을 하신 적이 없었다. 오히려 밤늦게까지 공
      부할라치면 아버지는 “너무 열심히 하지 말아라, 몸 상한다”고 하셨고, 어머니는 그저 “무
      조건 아프지만 않으면 된다. 공부든 뭐든 그저 중간치기만 하면 된다. 보통이 최고다“ 라
      고 하시며, 우리의 타고난 ’재능‘에는 전혀 무관심하셨다.
      우리 집에는 딱히 ‘가훈’이라고 정해 놓은 것이 없었지만 학교에서 가훈을 적어 오라면 그
      래도 항상 아버지 서재에 적혀 있는 ‘선내보- 善內寶(착한 것 속에 보물이 있다) ’라는 말
      을 적어 가곤 했다. 부모님의 교육관은 우리를 ‘착하고 건강하고, 보통인 사람들’로 키우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 우리 모두 착하고 건강하고 보통으로 잘 자랐다. 그래서 딱히 특별한 
      취미도 재능도 관심도 없었고 막상 대학에 갈 때 선뜻 선택할 전공이 없었다. 이미 서강대
      학교에 갈 것은 정해 놓았으므로 전공을 정해야 할 텐데 이거다 싶은 것이 없었다. 구두장
      이 아들이 맨발 벗고 다닌다고 항상 가르치는 일이나 번역 일에 바쁘셨던 아버지는 우리에
      게 개인적으로 영어를 가르치신 적이 없었으므로 영어를 남보다 잘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
      도 그나마 영어를 끔찍하게 싫어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아버지 외에 영문학을 전공한 언
      니와 오빠 덕분에 주변에 책도 많고 주워들은 작가 이름들도 꽤 되니까 그냥 영문학을 택했
      다. 미칠 듯이 좋아한 작가가 있거나 꼭 연구해 보고 싶은 작가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어 특별히 못하지 않는 영문학을 택했을 뿐이었다.
      
      ('The Smile'/ Thomas Webster)
      때문에 나는 뛰어나게, 막말로 ‘화끈하게‘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오래 전 미국에서 모차
      르트의 생애를 그린 <아마데우스> 라는 영화를 봤는데, 일생 동안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질
      투하고 병적으로 시기한 살리에리가 마지막 장면에서 정신병동으로 들어가면서 하는 말,
       “히히히, 나는 보통밖에 안되는 것의 챔피언이다!(I'm the champion of mediocrity, 영어 
      단어 mediocre를 찾으면 우리나라 사전엔 ‘보통의, 평범한’ 이라고 뜻풀이가 되어 있지만, 
      단순히 ‘보통의’ 의미가 아니라 ‘보통밖에 안되는‘ 이라는 경멸적인 어조가 담겨 있다. )”라
      고 하는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적이 있었다. 나의 인생을 어쩌면 그렇게 간략
      하고 정확하게 요약하는 말이었는지...
      내 인생이야말로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하기 짝이 없는 나의 삶에 대해 썩 만족하고 있지는 
      않아도 그렇다고 그에 대해 심각하게 고뇌하지도 않는다. 그냥 하루하루 어영부영 살아갈 
      뿐이다. 따져 보면 공자님도 중용의 길을 추천하시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보통 “삶은 양보
      다 질이다. 지지부진하게 길고 가늘게 사느니 차라리 굵고 짧게 사는 것이 낫다.”  라고들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데, 화
      끈하고 굵게. 그렇지만 짧게 살다 가느니 보통밖에 안 되게, 보일 듯 말 듯 가늘게 살아도 
      오래 살고 싶다.
      언젠가 조카의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 중에 <나의 잃어버린 한 조각(My Missing Piece)>
      이라는 짧은 그림 동화를 읽은 적이 있다.
      몸의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가 온전하지 못한 동그라미가 있었습니다. 동그라미는 매우 슬펐
      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동그라미는 잃어버린 조각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나는 나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고 있습니다.
      내 잃어버린 조각 어디 있나요
      하이- 디- 호,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 잃어버린 조각을 찾습니다.“
      동그라미는 때로는 비를 맞고 때로는 눈에 묻히고. 또 때로는 햇볕에 그을리며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런데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으므로 빨리 구를 수 가 없었
      습니다. 그래서 힘겹게, 천천히 구르다가 가끔 멈춰 서서 벌레와 대화도 나누고, 쉬면서 
      길가에 핀 꽃 냄새도 맡았습니다. 어떤 때는 딱정벌레와 함께 구르기도 하고, 또 어떤 때
      는 나비가 동그라미의 머리 위에 내려앉기도 했습니다.
      바다와 늪과 정글을 지나고 산을 오르내리던 어느 날,  혼자 떨어져 있는 조각을 하나 만
      났습니다. 너무 반가워 떨어져 나간 귀퉁이에 맞춰 보니 그 조각은 너무 작아 동그라미의 
      몸에 맞지 않았습니다.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다시 조각 하나를 만났으나 그 조각은 너
      무 컸습니다. 다음 조각은 네모 모양이라 맞지 않았고, 또 그 다음에 만난 조각은 너무 
      날카로웠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조각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 조각은 자신의 몸에 꼭 맞
      을 것 같았습니다. “맞을까? 맞을까?” 궁금해 하며 맞춰 보니 아주 꼭 맞았습니다. 동그
      라미는 이제 완벽한 동그라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몇 배 빠르고 쉽게 구를 
      수 있었습니다. 
      
      ('The Frown' / Thomas Webster)
      그런데 떼굴떼굴 구르다 보니 벌레와 얘기하기 위해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꽃 냄새도 
      맡을 수 없었고요, 휙휙 자나가는 동그라미 위로 나비가 앉을 수 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노래는 부를 수 있겠지, 동그라미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 잃어버린 조각을
       찾습니다> 라는 노래를 부르려고 했습니다.
      “내해 힐어버진.... 초각글... 착작답네다. 헉”
      아, 너무 빨리 구르다 보니 노래도 부를 수 없었습니다. 완전한 동그라미가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동그라미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구르기를 멈추고 찾았던 조각을 살짝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몸으로 천천히 굴러가며 노래했
      습니다.
      “내 잃어버린 조각을 찾고 있습니다.”
      그때 나비 한 마리가 동그라미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습니다.
      ‘완벽함의 불편함’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동화이다. 아무 것도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없는 것은 어쩌면 겉보기처럼 그렇게 행복하고 멋진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아닌게아
      니라 천재라 불리는 유명한 연주가나 운동 선수들이 간혹 외로움을 호소하며 ‘보통의’ 
      삶을 선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한 귀퉁이 떨어져 나간 동그라미가 남이야 뭐라든 삐뚤삐뚤 천천히 구르며 길을 가다
      가 멈춰 서서 벌레와 이야기도 하고 꽃 냄새도 맡는 것이 완벽한 몸으로 너무 빨리 굴
      러서 헐떡거리며 노래조차 할 수 없는 완벽한 동그라미 삶보다는 나아 보이는 것도 사
      실이다. 내가 동그라미라면 한 조각이 아니라 여러 조각, 군데군데 이가 빠져 어리둥절
      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아주 천천히 굴러가는 동그라미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게으fms 내가 감당하기에는 세상일이 너무나 바빠 헐떡거리고 있으니,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 재능을 다 살려 완벽하고 세련된  동그라미가 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
      이다. 그래서 이렇게 더운 여름날 보통밖에 안 되는 재주로 보통밖에 안된는  글이나마 
      마감 시간 전에 끝내려고 열심히 글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게 힘들지만, 이게 끝나면 오
      늘은 공부는 덮어두고 좋아하는 사람과 저녁 약속까지 해 두었다.
      보통밖에 안 되는 딸이 보통밖에 안 되는 글을 쓰느라 진땀 흘리고 있는 걸 아시는지,
       어머니가 거실에서 전화로 조카가 기말 고사를 망쳤다고 하소연하는 동생에게 큰 소
      리로 말씀하신다. 
      “야, 망쳤으면 어떠냐. 그저 중간치기만 하면 된다. 보통이 최고다!”
      [Rodgers, Richard - The Sound of Music]
      / Laendler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메모 :